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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다수당의 질주 vs AI 시민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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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새해 새 아침, 필자의 소망은 소박하다. 한때는 사소해 보였던 고마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코로나 휴직 중인 이들은 일터로, 자영업자들은 다시 떠들썩해질 가게로, 시니어들은 코로나 공포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소박한 일상의 회복에는 코로나 전쟁 중에 기울어진 건강권과 프라이버시 불균형의 회복도 포함된다.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우리는 어딜 가고 누굴 만나는지를 통째로 파악 당하는 빅데이터 기반의 K방역에 동의하고 적극 참여해왔다. 새해에는 자유와 프라이버시의 일상을 되찾고 싶다.

새해 소망은 우리 모두의 일상회복 #민주주의 일상성 회복이 시민 바람 #다수파 권력의 절제 작동 안 해 #시민들, 빅데이터로 권력 견제해야

정치학자로서 필자의 소망은 다수파 입법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촛불혁명의 정치’를 넘어 민주정치의 일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80석을 거느린 거대 여당은 지난 한해 촛불혁명의 적자를 자임하며 ‘혁명 입법’에 몰두해왔다. 하지만 거대 여당의 지지율 30%는 혁명적 실험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의 표현이다. 시민들은 요란한 이념의 실험보다 사소한 일상이 삶의 진실에 가깝다고 느낀다.

촛불혁명의 깃발 아래 어지러운 입법 실험을 거듭하는 여당 엘리트들의 질주를 제어하는 세 가지 길을 생각해보자. ①권력의 절제와 관용 ②입법 권력에 대한 다른 권력의 통제 ③시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견을 두루 집적한 빅데이터를 구성하고 이에 기반한 시민들의 인공지능 쌍둥이가 입법 권력을 모니터링하는 길. ①②는 독자들께서 익히 들어 보았을 방식이다. ③은 정치학자의 한가한 잠꼬대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시민들의 일상을 낱낱이 추적하는 빅데이터를 통해 K방역을 주도하듯이, 빅데이터는 역으로 시민들이 입법 엘리트들의 폭주를 모니터링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선 고전적인 권력 제어 방식들이 한국에서 작동하지 않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째, 권력의 절제와 관용.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사실은 다수의 폭주를 어떻게 제어할지를 고민해 온 역사였다. 엘리트들은 권력을 장악하는 순간부터, 자신들은 시민들 전체로부터 자율적인 주권을 넘겨받은 것으로 자처해왔다. 그에 따라 다수파 엘리트들은 주권자인 시민 전체에게 자기들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종용하는 일을 벌이곤 했다. 질주하는 다수파 엘리트에게 절제와 관용의 미덕을 발휘하라는 주문은 한국 의회정치에서는 공허한 언어이다. 지금의 야당도 의회 다수를 장악했을 때, 다수의 권력을 맘껏 휘둘러왔다. 작은 타협과 절제는 있었지만, 중대 이슈에서는 보수, 진보 구분 없이 다수파의 폭주가 반복되어왔다. 보수 정당이 빈약한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을 국회에서 탄핵했던 일이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둘째, 다수파 엘리트들에게 절제와 관용의 덕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야심은 또 다른 야심으로 견제한다는 구상이 권력분립이라는 제도적 해법이다.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입법 엘리트(하원)의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고, 법을 최종 해석하는 대법원 판사들의 임기를 종신제로 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입법자를 자임하는 지금의 여당에게 권력분립이라는 제도는 거추장스러운 적폐일 뿐이다. 결국 남는 방안은 주권자인 시민들(촛불 집회의 실제 주인이었던)이 직접 나서는 길이다. 빅데이터와 머신러닝의 진전에 따라서 시민들이 입법 엘리트의 질주를 직접 견제하고 모니터링하는 길은 새로운 가능성을 맞고 있다.

혁신의 나라 뉴질랜드는 샘(SAM)이라는 인공지능 정치인을 선구적으로 탄생시켰다(politiciansam.org). 샘은 증강된 데이터 처리 능력을 통해서 시민들이 많이 읽는 뉴스 사이트,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댓글, 포스팅 등으로부터 시민들의 집합적 의견을 실시간으로 축적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을 직접 대표하고자 설계되었다. 샘은 자연어 추론을 통해 시민들이 소셜 미디어에 남기는 의견의 톤과 감정까지 유추할 수 있다. 데이터 축적과 자연어 추론, 인지 아키텍처를 통해서 샘은 궁극적으로는 의회에서 논의 중인 법안 내용과 시민들의 집합적 의견의 일치도를 계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넷플릭스가 메인 화면의 추천 영화와 필자의 취향 일치도가 91%라고 표시해주듯이.

물론 한국의 입법 엘리트들은 인공지능 시민대표의 보안성, 중립성, 외부 조작 가능성을 거론하며 거세게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기반한 디지털 쌍둥이들은 이미 우리 일상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K방역의 동선 데이터, 네이버, 카카오, 쿠팡에는 우리의 취향, 성향, 견해를 무서운 속도로 축적하는 디지털 쌍둥이들이 커가고 있다.

자율주행차가 수많은 운전 기사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듯이, 질주하는 입법 엘리트들을 당장 인공지능 시민 대표들로 대체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늘은 다만 시민들의 디지털 쌍둥이들로 하여금 입법 엘리트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입법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정부와 권력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시민들의 디지털 쌍둥이는 입법 엘리트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시민 주권 회복의 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