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1870년대 세계 불황 때 유럽 귀족 민낯 그린 풍자극

중앙일보

입력 2020.12.31 08:00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41)

여기 연말 파티에서의 어처구니없는 허물을 술 때문이라며 덮어주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1874년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발표한 오페레타 ‘박쥐’는 등장인물을 통해 당시 빈 상류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쾌락을 탐닉하는 남편, 결혼 후 여전히 외간 남자를 불러들이는 부인,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허세 귀족과 연예인이 되고자 유력자의 후원을 바라는 하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흥겨운 음악에 즐거워하는 관객은 은밀한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풍자에 움찔합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쾌락을 탐닉하는 부부의 가면 사진. [사진 flickr]

쾌락을 탐닉하는 부부의 가면 사진. [사진 flickr]

경쾌한 왈츠풍의 서곡이 흐른 뒤 막이 오르면, 아이젠슈타인 남작의 집. 창밖에서 알프레도가 지금의 남작 부인이 된 옛 애인 로잘린데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지요. 이런, 지나간 사랑은 잊어야 하는데 집 앞에서 노래하다니? 그런데 그 노래를 듣는 로잘린데는 그를 알아보고 반색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들의 관계가 슬슬 불안해지는군요.

남작은 다음 날부터 경범죄로 며칠간 구류를 살아야 하는데, 친구 팔케 박사가 오늘 밤에 있을 공작의 무도회에 가자고 제안합니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결국 부인을 속이고 파티에 갔다가 아침에 시간 맞춰 감옥에 가기로 합니다. 로잘린데는 남편을 걱정하는 척하며, 알프레도를 집에 들일 생각에 기분이 들뜨지요. 로잘린데의 드레스를 훔쳐 입고 화려한 무도회에 참석하려는 하녀 아델레까지 환상에 빠져 즐거워합니다.

남작이 사라지자 알프레도가 집으로 들어와 ‘마셔요, 내 사랑’을 부르며 그녀와 달콤한 시간을 보냅니다. 심지어 알프레도는 남작의 호화로운 의상까지 걸치고 하룻밤 남편 노릇을 하겠다고 합니다. 부도덕한 장면이지만 그들의 노래는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지요.

이때 남작을 연행하려고 교도소장인 프랭크가 들어옵니다. 불륜 현장을 들키게 된 로잘린데는 알프레도가 남편인 것처럼 사랑의 키스를 하며 연기를 하고, 그런 모습을 본 프랭크는 의심 없이 남작의 가운을 입은 그를 연행하지요.

오를로프스키 공작의 화려한 가장무도회는 팔케가 공작에게 부탁해 준비한 각본이지요. 아델레는 로잘린데의 드레스를 입고 배우로, 아이젠슈타인은 프랑스의 후작으로 변장하고 참석합니다. 그 밖에도 교도소장이 프랑스 신사로 변장합니다.

배우 아델레를 소개받은 남작은 자기 집 하녀와 닮았다며 추궁하는데, 아델레는 자신의 매끈한 몸매나 화려한 드레스를 자랑하며 시치미를 떼고 하녀와 비교하지 말라며 비난합니다. 결국 남작은 착각이었다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사과하지요.

교도소장이 남작과 엉터리 불어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마침내 가면을 쓴 헝가리 백작 부인이 우아하게 등장하는데 바로 로잘린데지요. 멋진 미인이 등장하자 남작은 2중창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워’를 부르며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아내에게 반한 남편의 모습, 익숙하다는 이유로 귀한 것을 놓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라고 암시하는 듯합니다.

그는 부인에게 구애하며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달라고 간청하지요. 허나 로잘린데는 그와 밀당을 하며 사랑의 징표로 그의 회중시계를 달라고 합니다. 결국 소득 없이 시계만 넘긴 그는 외도의 중요한 증거가 로잘린데에게 넘어갔음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지요.

모두 흥겨운 음악과 함께 샴페인을 마시고 왈츠를 추며 무도회를 즐기는 가운데 아침이 되어 6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감옥으로 가야 하는 남작과 교도소장은 서둘러 코트와 모자를 챙겨 같이 무도회장을 떠나지요.

이제 감옥입니다. 소장 프랭크는 간밤의 무도회 분위기에 빠져 있는 듯 중얼대는데, 아델레는 간밤에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그를 뒤쫓아 왔습니다. 그를 프랑스 귀족으로 오인한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주며, 배우로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남작이 감옥에 자진 출두하자, 프랭크는 깜짝 놀라며 전날 밤 자신이 화려한 가운을 입은 남작을 체포해 가두었다고 말하지요. 로잘린데와 함께 애정 어린 키스로 헤어졌었다는 사실도요. 남작은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고 분노합니다.

알프레도의 변호사가 도착하자, 남작은 그 대신 변호사로 변장합니다. 그는 변호를 위해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알프레도와 로잘린데에게 전날 밤 자기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캐묻습니다. 남작은 꼬치꼬치 추궁하고, 로잘린데는 알프레도의 변호를 잘해달라며 남편의 부도덕함까지 공개하지요. 이에 질투심이 타오른 남작은 스스로 변장을 풀고 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공언하지만, 그녀가 그의 결정적인 외도의 증거인 시계를 들이대며 역습을 해오자 이내 풀이 죽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팔케의 연극이었음이 드러났지요. 예전에 무도회에서 박쥐로 변장하고 취한 자신을, 친구인 공작이 버려두고 가서 당한 망신을 갚으려 꾸민 것이었거든요. 남작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며 이 모든 것이 샴페인 탓이라고 변명하고, 부인은 남작을 용서하고 모두가 흥겨운 합창을 부르며 막을 내립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해야 할 시간! [사진 flickr]

이제는 우리가 용서해야 할 시간! [사진 flickr]

오페라 초연 당시 빈은 세계 경제위기가 덮쳐 소위 대공황의 원조 격인 ‘대불황’ 기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오페라 초연 전해인 1873년 4월 8일 빈 증권거래소에서 시작된 주가 폭락 사태는 급기야 거래소 폐쇄로 이어진 상태였지요.

그런데도 막대한 부를 쥐고 있던 귀족들은 경제 위기상황과는 무관하게 생활하고 취하거나 애욕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모두 술 때문이라며 남 탓으로 돌리고 흥겹기만 하지요. 그나마 묵은해를 관용으로 떠나 보내고, 신나는 새해를 맞이하자는 메시지를 찾아낸 것이 다행이랄까.

작곡가는 예리하게 관찰한 사회의 민낯을 자신의 활기 넘치는 왈츠 리듬에 극적인 재미와 유머를 담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으며, 그로써 이 작품은 시대를 관통하는 최고의 작품이 되었답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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