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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Y' 디자이너, 샹송 여왕, 영원한 007…벌써 그립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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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헬렌 레디, 숀 코너리, 알렉스 트레벡, 커크 더글라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마라도나, 존 르 카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헬렌 레디, 숀 코너리, 알렉스 트레벡, 커크 더글라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마라도나, 존 르 카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죽음이 삶에 성큼 다가온 2020년, 세계의 많은 스타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여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이들도 있지만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조용히 떠나간 이들도 많다. 뉴욕타임스(NYT)ㆍ워싱턴포스트(WP)ㆍ이코노미스트 및 자서전 등을 종합해 10인의 부음을 전한다.

밀턴 글레이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밀턴 글레이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글레이저를 모를 수는 있지만 그가 디자인한 이 로고를 모를 순 없다. ‘I♡NY.’

지난 8월 뉴욕의 한 전시장에 설치된 'I♡NY' 대형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월 뉴욕의 한 전시장에 설치된 'I♡NY' 대형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글레이저는 1977년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이 로고를 스케치북에 그렸다고 한다. 당시 뉴욕시의 재정은 파산 위기에 이를 정도로 열악했고, 시 정부는 관광업에 사활을 걸기로 결정했다. 그 첫걸음으로 뉴욕시를 홍보할 로고 제작을 기획했고, 당시 잘 나가던 그래픽 디자이너 글레이저가 섭외된 것.

뉴욕시 브롱크스에서 나고 자란 글레이저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작업했다. 그 공로로 2010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영감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 글레이저는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엔 사람들이 ‘난 OO를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게 유행이었고, 그걸 적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 로고로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글레이저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디자이너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의 앨범 작업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반(反)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며 사회 문제에도 적극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자서전 『불찬성의 디자인』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곧 좋은 시민의 역할과 같다”며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시대의 소명을 인식하고 이를 행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 그게 좋은 디자이너”라고 적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프랑스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노래, ‘파리의 하늘 아래(Sous le Ciel de Paris).’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가장 많이 검색되는 버전은 역시 여성 샹송 가수 쥘리에트 그레코다. 샹송의 여왕으로 불렸던 그레코가 지난 9월 23일 숨졌을 때,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도 장례에 참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와중이었음에도 샹송의 여왕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서다.

마크롱 여사는 검은 색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이는 애도의 뜻뿐 아니라 그레코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레코는 항상 검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검은 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레코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 독일군에 저항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소속이었던 모친을 전쟁 중에 잃고 파리로 상경했다. 일찌감치 노래를 시작했고, 그레코의 어둡고 굵으면서 흡입력 있는 목소리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봐르 등 유명 작가와 장 콕토 등 영화감독과 친분을 쌓았다.

그가 즐겨 불렀던 노래 ‘파리의 하늘 아래’ 가사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파리의 하늘 아래, 노래들은 새처럼 날아다니지 (중략) 노트르담 성당 가까이에선 비극도 자주 일어나지만, 파리에 남는 건 희극뿐이지. 모든 건 잘 해결된다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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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정보기관 요원이었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영국 정보기관 MI6에서 스파이 등 요원으로 활약했던 경험을 작품에 녹였다. 본명은 데이비드 콘월이지만 익명을 썼다. 르 카레(le Carré)는 프랑스어로 ‘사각형’을 의미하지만 작가 본인은 생전에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간판에서 본 단어를 붙였을 뿐”이라며 “다른 나라 말을 쓰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하곤 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 간의 냉전이 한창이던 때 정보 요원으로 재직하면서 1959년 데뷔작 『죽음의 유혹』을 냈다. 이후 1963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로 이름을 알린 뒤 1964년부터 전업 작가로 생활했다. 현업에서 쌓은 디테일로 스파이 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영국인 특유의 유머 감각도 발휘한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서전을 쓸 계획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끔찍한 일”이라며 “무슨 허구의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밀지가 벌써 떠오른다”고 눙쳤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영국 시골에 별장을 짓고 글을 쓰는 걸 즐겼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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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TV 시리즈로 영화로도 제작된 ‘섹스 앤 더 시티’. 영화 2편에서 네 여주인공이 손을 잡고 부르는 노래가 있다. ‘나는 여자다(I Am Woman).’ 지난 9월 29일 사망한 호주 여성 가수 헬렌 레디의 전설적 노래다. “나는 여자야, 내가 포효하는 걸 들어봐”라고 시작해 “나를 굽힐 순 있어도 부러뜨릴 순 없어”라는 이 노래는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제가로 떠올랐다.

레디는 호주에서 연예계에 종사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며 4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심리학을 전공하다 본격 가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페미니즘 운동에 동조한 레디가 공동 작곡한 노래가 ‘나는 여자다’라고 한다. 그는 당시 빌보드북에 “여성 운동을 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힘찬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없더라”며 “그래서 내가 직접 썼다”고 말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그를 “70년대 팝의 여왕”이라 불렀고, 빌보드지는 그를 2011년 “가장 영향력 있는 남녀 가수 100명 중 28위”로 꼽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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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성인판 ‘장학퀴즈’에 해당하는 롱런 퀴즈쇼 ‘제퍼디!(Jeopardy!)’는 37년간 쇼를 진행해온 인물을 잃었다. 1984년부터 마이크를 잡아 온 알렉스 트레벡이 주인공. 지난 11월 8일 사망했다. 당초 2022년까지 쇼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병마로 중간에 그만둬야 했다. 췌장암이었다.

트레벡은 특유의 차분함과 지적인 이미지로 ‘제퍼디!’의 간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사부터 천문학까지 다양한 소재의 지식을 다루는 이 프로그램의 책임 프로듀서인 마이크 리처드는 CNN에 "트레벡은 곧 우리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동의어였다"고 추모했다.

캐나다 출신으로 오타와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에서 토론 동아리를 하며 방송 진행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NBCㆍCBS에서 커리어를 쌓다 ‘제퍼디!’에 낙점됐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난 평생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성취는 멀었다”면서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죽을 때조차 답을 구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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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여성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다.” 긴스버그의 이 말에 지구촌의 남녀 모두 동의의 박수를 보냈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평생 달고 살았던 진보의 아이콘. 미국 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차별에 맞서온 긴즈버그가 암 투병 끝에 9월 18일 사망했다.
 그의 타계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성향 앤 배럿을 후임으로 지명하면서 미국 정계에도 파장이 일었다. 긴즈버그는 이념의 대척점에 서있던 보수성향 대법관 앤터닌 스칼리아와는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오페라에도 일가견이 있던 긴즈버그를 기린 작품으로 ‘스칼리아/긴즈버그’가 쓰여졌을 정도다. 그가 차별에 맞서며 외쳤던 ‘나는 반대한다’는 그의 생애를 다룬 저작과 영화의 제목으로 남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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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로부터 '미션'을 거쳐 '시네마 천국'에서 흐르는 선율을 잊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가 낳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평생 500편 넘는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그는 7월 5일 92세를 일기로 천국으로 떠났다. 그가 참여한 영화는 눈으로 보는 영화를 뛰어넘었다. 그는 영화에 소리로 색을 입히는 마술사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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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007이자 수트 핏의 정석 숀 코너리가 올해 세상을 떠났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출신인 그는 23살 되던 해 ‘미스터 유니버스’로 선정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지만 30대 초반까지 단역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그의 체격을 눈여겨본 제작진이 그를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캐스팅했고, 스타로 거듭났다. 그는 내리 007 영화 7편에 출연했다. 그간 많은 007들이 등장했지만 그가 없는 007은 그가 타계한 이후에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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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세로 영면에 든 이 배우는 현 세대에겐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커크 더글러스는 1940~50년대를 풍미한 배우다.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배우를 꿈꾸며 꾸준히 노력해 스타덤에 올랐지만 오스카상은 타지 못했다. 그는 장수의 비결로 “아내와 60년간 해로한 것”을 꼽았다. 그는 이제 '영원한 스파르타쿠스'로 기억 속에 남게 됐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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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의 황제로 불렸던 코비 브라이언트. 1월 26일 헬기 사고로 딸과 함께 숨졌다. 브라이언트는 20년 간 LA레이커스에 몸 담았고 그와 동료들의 활약으로 팀은 NBA 정상에 5번 올랐다. 브라이언트 본인도 득점왕에 두 번 올랐다. LA레이커스는 그의 등번호인 8번과 24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실패할 것”부터 “비결은 없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것뿐”까지 코비는 그의 성공을 명언으로 남겼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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