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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암울한 세상에서 사소한 희망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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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정책디렉터

최현철 정책디렉터

“아빠, 주식투자 해보면 어떨까?” 지난 봄이 끝나갈 무렵, 대학 신입생인 딸이 물었다. 대구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코로나19가 다소 주춤하던 시점이었다. 3월에 1300대까지 떨어졌던 코스피 지수는 슬금슬금 올라 벌써 2000포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가 아닌 것 같아.” 점잖게 말렸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 무역 위축, 시장의 과열 분위기 등 위험요소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줬다. 하지만 별로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딸은 계좌를 만들었고, 용돈을 모은 적은 금액이나마 투자를 했다. 포트폴리오를 보니 삼성전자를 비롯한 우량기업들이었다.

코로나로 희망 찾기 힘든 한 해 #잘 버틴 증시, 법원 역할로 위안 #반쪽 희망, 방심하면 더 큰 파국

이후 주식시장은 내 호언장담을 한참 벗어났다. 멈추지 않고 오르는 주가에 싱글벙글하는 딸과 ‘걱정하고 재기만 하는 헛똑똑이’라고 놀리는 아내 옆에서 가장의 권위는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한순간 놀림감이 된다고 한들 코로나와 부동산 쇼크로 가슴앓이하던 동학개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준 우리 기업의 선전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과 과천 법무부 청사는 올해 내내 전쟁터였다.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잃은 청와대와 여권은 추미애 장관을 앞세웠다. 그리고 인사 학살, 사상 두 번째와 세 번째 지휘권 발동, 헌정사 처음으로 기록된 검찰총장 직무정지와 징계 강행까지 무자비하고 거침이 없는 행보를 거듭했다. 과거 정권은 비록 속내가 시커멓더라도 어느 정도 체면과 명분을 따지고 절차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엔 집권세력의 비리에 칼 들이미는 검찰총장 제거에 목숨을 걸 뿐, 스스로 내세운 검찰개혁이란 명분이 훼손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차적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모두 무너지려는 순간, 법원이 나섰다. 검찰총장 측이 신청한 두 차례의 집행정지 요청을 모두 받아줬다. 단순히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결정문을 통해 정권과 검찰과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했다. 정권을 잡은 세력이 아무리 원해도, 헌법과 법률을 벗어나선 안 된다는 따끔한 지적이었다. 인치의 시대로 돌아가기엔 우리 사회가 걸어온 법치의 길이 상당히 멀고 길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올봄에는 눈이 호사를 누렸다. 황사와 미세먼지 없이 연속해서 파란 하늘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다. 코로나로 중국의 경제활동이 멈추고 우리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다. 인간의 움직임이 멈춘 거리에 야생의 동물들이 나타나고, 희뿌연 공기는 투명하게 바뀌었다. 그동안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시름시름 앓아왔다. 과학자들은 회복이 불가능해지는 임계점을 코앞에 두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가 인간과 각국 정부의 욕심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조차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올 초 나타난 이 생경한 풍경들은 적어도 지금 행동을 바꾸면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올해 마지막 지면에 실릴 칼럼엔 좀 희망적인 얘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불러온 골이 너무 깊었다. 정치는 그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여전히 모두가 아프고 세계가 앓고 있는 와중에 어렵사리 찾아낸 희망적인 모습이 겨우 이 정도다. 이마저도 그저 가능성일 뿐, 완결된 해피엔딩은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큰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진행형의 사안들이다.

경제는 여전히 불안하다. 세계는 코로나의 3차, 4차 유행을 맞아 경제활동을 다시 멈추고 있다. 백신의 효험과 경제의 녹다운 간에 시간 싸움이 한창이다. 우리 정부도 곳간을 다 털고 빚까지 내서 거듭 지원책을 냈지만, 경제가 정말 극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법무부와 대검의 혈투는 윤석열 총장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검찰이 자신들을 충견으로 만들려는 정권의 시도를 물리쳤다고 해서 곧바로 인권의 파수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은 아직도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국정원이 조작하고 검찰이 열심히 거든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 간첩사건도 마찬가지다. 이춘재 대신 윤성여씨를 화성 연쇄살인범으로 기소한 사건에서 보듯, 조작과 인권침해는 공안사건에만 그치지 않는다. 서지현·임은정 검사가 목청껏 내부비리를 폭로해도 여간해선 수사하지 않는다. 독립성을 지켜낸 검찰의 폭주를 제어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K방역은 코로나 사태 초기 우리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작은 성공에 취해 홍보에 집착하는 동안, 백신 확보에 온 힘을 쏟은 방역 후진국들에 추월당했다. 똑같은 일이 새해에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아직 가능성인 희망을 진짜 성공으로 만들 수 있다.

최현철 정책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