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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띄우기, 전문가 죽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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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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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전문가의 발화에 힘이 실렸던 올해에 다른 한쪽에선 허명의 전문가들이 잇따라 퇴출되는 사태가 있었다. 엊그제 역사강사 설민석이 논문 표절 사실을 인정하고 출연하던 방송에서 하차하고 자숙하겠다고 밝혔다. 그에 앞서 ‘힐링멘토’를 자처하던 혜민 스님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무소유는커녕 ‘풀소유’ 일상을 드러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활동 중단했다. 둘 다 방송·출판을 넘나들며 인지도를 쌓고 개인사업까지 승승장구하다 한순간 주저앉았다.

실은 사태 전부터 이들 ‘전문가’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알았다. 설민석의 경우엔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까지 손댄 게 화근이었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을 거론하지 않아도 그가 모든 역사의 ‘그랜드 마스터’일 수가 없다. 그가 인강 스타를 넘어 방송 스타가 된 것은 역사학에 정통해서라기보다 ‘역사 소재로 시청률 끌어올리기’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 오류가 제기됐을 때도 시청률 자체는 영향받지 않았다. 인스턴트 인문학 수요와 예능 쇼맨십의 만남이 본질이라서다.

노트북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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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방송가에선 ‘상품성’을 갖췄다 싶으면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 스타PD는 과거 퀴즈프로그램에서 출연자 실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답 틀린 걸 편집하고 새로 녹화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지인은 내로라하는 강연 스타와 작업하면서 그가 녹화 중에 잘못 발언·판서한 것을 CG 처리해 방송하느라 매번 골머리를 썩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전문가 포장이 옳으냐 그르냐, ‘지식 소매상’의 본질이 뭐냐를 떠나 이런 관행에 위기 신호가 왔다는 걸 감지 못한 제작진의 ‘전문성’이 가장 부족했다. ‘벌거벗은 세계사’의 경우 해당 분야 전문가한테 자문까지 구하고도 반영하지 않았다니 게으르거나 오만했거나 둘 다이다.

‘못 믿을 전문가’에 지나치게 분개·낙담할 것은 없다. 애초 이번 사태가 빚어진 건 소셜미디어 상의 잇단 폭로 때문이었다. 레이첼 보츠먼의 『신뢰 이동』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지역공동체 기반의 ‘지역적 신뢰’로부터, 산업시대에 형성된 ‘제도적 신뢰’로 이어졌고 현재는 개인 하나하나가 검증하고 품평하는 ‘분산적 신뢰’의 초기 단계다. 말하자면 이제까진 방송사가 믿음직한 전문가를 띄우고 이에 기반한 권위로 시장이 형성돼 왔다면 이젠 그 명성이 SNS를 통해 탈탈 털리는 세상이다. 다만 명심할 게 있다. 전문가 띄우기의 전문가들만큼이나 전문가 죽이기의 전문가들도 득실댄다. 벌써부터 “설민석 다음은 누구냐”며 유튜버들이 ‘먹잇감’을 찾는다는 말이 들린다.

강혜란 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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