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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김규식인가···"진영대결의 한국, 그 통합정신 새길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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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선생 [중앙포토]

김규식 선생 [중앙포토]

우사 김규식은 우리에게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다. 현대사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기도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 3거두'로 불렸지만 앞선 두 사람에 비해 인지도는 여전히 낮다. 하지만 독립운동부터 남북협상까지 그가 지내온 일생은 간단치 않다.

70주기 맞아 『우사 김규식 어록』 발간 #해방 후 좌우합작 시도한 중도우파 정치인 #현실정치 부딪히면서 남북 모두에게 잊혀

어려운 살림 때문에 일찍이 언더우드 목사의 돌봄을 받은 그는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1896년 17세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창설했고, 1919년엔 조선 독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1919년 4월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됐고, 광복까지 임시정부의 활동을 이어갔다.

김규식은 중도 우익성향으로 좌파와도 연대하곤 했다. 이는 1946년 38선 이남에 좌우 연립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의 의도와도 맞아 한때는 미국에서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을 지원하기도 했다. 냉전이 심화하며 결국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좌절되자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6··25 전쟁 때 납북된 그는 1950년 12월 평안북도 만포군에서 사망했다.

올해 사망 70주기를 맞아 『우사 김규식 어록』(전 5권)이 나왔다. 우사연구회에서 이 작업을 추진한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30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냉전의 분위기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우사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심지연 경남대 교수 [사진 심지연 교수]

심지연 경남대 교수 [사진 심지연 교수]

-우파의 3거두였고,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활약상에 비해서 아직도 생소한 이름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밀착하지 않은 탓이다. 좌익진영은 박헌영·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련에 기대었고, 우익에선 이승만과 한민당이 미국과 적극 손을 잡았다. 반면에 김규식은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양쪽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했다. 결국 민족의 자체 역량으로 구심력을 키우려던 그의 구상은 냉전 강화와 미·소라는 원심력에 의해 무너졌다.

-일찍이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고 미국 유학생활을 했다. 이승만과 비슷한 환경인데, 미국과 거리를 둔 이유가 뭘까
=쓰라린 좌절에서 온 경험 때문이다. 그는 1919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를 받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파리에 가보니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입으로만 약소민족과 식민지를 위한 것이지 실제로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가를 위한 잔치였다. 실망한 그는 소련으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도 소련의 실체를 보고 좌절했다. 결국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열강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임시정부 중요 간부였지만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김구와 협력하기보다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김규식이 볼 때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 때부터 줄곧 좌익과는 절대 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김규식은 일단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좌파와도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시정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중앙포토]

임시정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중앙포토]

-1949년 남북협상을 추진한 것도 공산주의에 이용당한 패착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규식은 소련에서 실망하기도 했고, 공산주의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본인은 우파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일단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선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분단보다는 다소간의 비용을 치르더라도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이 주도해 남조선 과도입법 의원이 구성됐고 김규식은 그해 12월 의장으로 취임했다. 미 군정은 좌파의 여운형과 우파의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운동을 일시적으로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김규식을 지도자로 점찍었는데 실패한 원인은 뭔가
=당초 미국은 한반도에 중립적 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소련이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을 중심으로 38선 이북에 국가 설립을 착착 진행해갔다. 동유럽도 공산화가 진행되고 중국도 공산당으로 넘어가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보다는 공산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좌우합작에 대한 지지를 거두면서 김규식도 힘이 빠졌다. 여기에 1947년 여운형이 피살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김규식으로서는 파트너를 잃은 셈었고 좌우합작운동을 급속도로 쇠락했다.

북한에 있는 김규식 선생 애국열사릉 [중앙포토]

북한에 있는 김규식 선생 애국열사릉 [중앙포토]

-지금 우리에게 김규식이 주는 메시지가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은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겪고 있다. 해방 직후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이 추진한 것이 좌우합작이다. 그런 우사의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국민통합, 사회통합, 남북평화 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김구가 살았던 경교장, 이승만이 살았던 이화장은 모두 보존이 되고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김규식이 살았던 삼청장은 지금 접근할 수 없다. 청와대 부지 안에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측에 삼청장 개방을 건의했는데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평화 정책과 가장 잘 맞는 것이 우사의 정신이다. 대승적으로 결단해줬으면 좋겠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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