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빌 비올라,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2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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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길이 11m에 달하는 대형 비디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한 방향으로 걷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숲속에서 그들은 계속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약 30분 동안 행렬이 이어지는 이 비디오의 제목은 ‘행로(The Path)’.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69)의 영상 설치작품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의 다섯 개 영상 중 일부입니다. 언뜻 이야기만 들어도 꽤 지루할 것 같죠? 그런데 그 반대입니다. 비올라의 영상 속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가지만, 예기치 못한 울림과 여운으로 관람객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행로’ 영상으로 돌아가 볼까요.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 숲은 이승 같기도 하고, 또 저승 같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 비올라는 “여기엔 어떤 시작과 끝도 없다 (···) 길 위의 여행자로서 그들은 두 세계의 중간 공간에서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비올라가 말하는 두 세계, 그것은 다름 아닌 삶과 죽음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나머지 영상 중 ‘여정(The Voyage)’이란 작품도 있습니다. 화면 왼쪽엔 집 안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노인이 있고, 집 밖으론 배에 짐을 실으며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화면은 마치 정지된 듯 별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 관람객은 노인과 배가 모두 떠나 비어 있는 부둣가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빌 비올라,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중 ‘대홍수’. [사진 부산시립미술관]

빌 비올라,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중 ‘대홍수’. [사진 부산시립미술관]

미국 출신의 비올라는 지난 40여년간 삶과 죽음, 인간의 감정 등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오며 ‘영상 시인’으로 불려왔습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영상 기술이 급격히 변화해온 것을 생각하면 이 분야에서 작가로서 자리를 굳히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비디오 아트의 기술적 가능성에 주목하던 70년대부터 삶과 죽음, 물질과 정신, 인간과 존재 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덕분에 비올라는 기술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첨단 기술을 통해 더욱 풍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로 시작한 미디어 아트는 비올라 등의 작품을 거쳐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로 진화 중입니다. 최근 전시로 논란에 휩싸였던 문재인 대통령 아들 문준용씨의 작품도 AR 기술을 적용한 것이었죠. 비디오 아트는 이제 현란한 기술의 힘으로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주목받고 있는 ‘빛의 벙커’, 서울 DDP의 ‘팀랩:라이프(Teamlab:Life)’ 전도 미디어 아트의 ‘오늘’을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지금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빌 비올라 전시(사전 예약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중심에 있는 미디어 아트의 역사를 확인하고, 독창적인 예술의 요소가 무엇인지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누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모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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