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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대본에 구두계약, 18시간 촬영까지”…방송연기자 불공정 관행 여전

중앙일보

입력

코미디언 A씨는 수년간의 준비 끝에 방송사 코미디언 공채시험에 합격해 2년간 전속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출연료는 주 1회 40만원. 이 마저도 출연을 못 하면 받을 수 없었다. A씨는 “유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생각에 회의와 리허설, 촬영에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계약 기간을 1년 남겨둔 시점에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A씨는 결국 꿈을 접고 택배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계약서 없이 작업, 출연 빌미로 출연료 깎기도”

문경새재에 위치한 한 드라마 세트장의 촬영 모습. [사진 문경시]

문경새재에 위치한 한 드라마 세트장의 촬영 모습. [사진 문경시]

 서울시가 방송 연기자들의 출연계약 및 보수지급 관행 등을 파악하기 위해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편법 계약을 비롯한 불공정 관행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식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구두로 출연계약을 하거나 차기 작품에 출연을 약속하고 출연료를 깎는 행위 등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연기자의 절반 이상이 생계를 위해 ‘투잡’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서울시가 방송 연기자 560명과 한국 방송 연기자 노동조합원 49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출연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는 전체의 49.4% 수준이다. 나머지 29%는 구두계약, 21.6%는 등급확인서 등 다른 문서로 대체했다. 등급확인서는 방송사가 1~18등급으로 연기자의 경력과 등급을 자체 평가한 문서다.

 이는 현행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라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다. 현행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제7조(대중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 2항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는 계약 기간·갱신·변경과 상표권, 수익분배 등에 관한 사항을 계약서에 명시해 서명한 계약서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10명 중 8명이 연 소득 1000만원 미만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3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스튜디오를 찾아 드라마 촬영 중인 제작진을 격려하고 방역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3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스튜디오를 찾아 드라마 촬영 중인 제작진을 격려하고 방역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출연자는 46.7%가 구두계약을 맺고 작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촬영이 끝난 후 야외수당이나 식비 등을 정확히 정산받지 못했다”는 답변도 43.2%에 달했다.

 출연료 자체도 적었다. 금액별로는 연기자 10명 중 8명(79.4%)가량이 연 소득 1000만원 미만이었다. 이들의 출연료는 전체 지급분의 5%에 불과했다. 반면 4.8% 수준인 연 출연료가 1억원을 넘는 연기자가 전체 지급분의 70.1%를 가져가고 있었다. 연기자별 양극화가 매우 심했다는 얘기다.

 촬영본에서 편집됐다는 이유로 출연료가 삭감 되거나(12.5%) 차기 출연을 이유로 출연료를 삭감하는 경우(27.1%)도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체 연기자의 절반 이상은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투잡족’인 연기자 중 78.5%는 “생계비 보전”을 이유로 들었다.

쪽대본에 18시간 이상 촬영…아역도 밤까지 

[사진 서울시]

[사진 서울시]

 촬영 직전 대본을 받는 이른바 ‘쪽대본’을 경험한 연기자도 전체의 33.4%에 달했다. 18시간 이상 ‘강행군 촬영’을 경험한 비율도 17.9%에 이른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대중문화예술인 방송출연표준계약서’에 따르면 촬영일 2일 전까지는 대본이 제공돼야 하고, 1일 최대 촬영 시간은 18시간을 넘을 수 없도록 돼 있다. 아동‧청소년 배우의 경우 오후 10시 이후 촬영을 제한해놨지만 66.7%가 ‘10시 이후 야간촬영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시와 한국 방송연기자 노조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회, 방송사 및 외주제작사와 협력해 개선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계약서 사전 검토 및 수액배분, 저작권 침해 등 피해구제 등을 무료로 지원하는 ‘문화예술 불공정상담센터’도 지원범위를 영세 외주제작사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서성만 서울시 노동민생정책관은 “열악한 여건과 불공정한 관행으로 연기자들의 창작 의욕이 저하되면 대중문화 산업까지 위축될 수 있다”며 “지속가능한 문화산업 성장을 위해 개선방안을 마련해 가겠다”라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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