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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즌2 일단 불발...7400만명은 아직 후속편 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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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2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202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올해 미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대확산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4년 전 파란을 일으키며 워싱턴에 입성한 '정치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물러나고, 워싱턴 경력 48년의 '베테랑 정치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에서만 1880만 명이 감염되고, 그중 33만 명이 사망한 팬더믹은 미국인들이 '정상으로의 회복'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휩쓴 2020년 리뷰]

올해 초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 측은 재선 가능성을 낙관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은 단 두 명뿐이었다. 특히, 경제가 순항할 때 미국인들은 대통령을 교체하지 않는 선택을 주로 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은 지난 1월은 사상 최장인 127개월째 호황이 이어졌고, 실업률은 1969년 이래 최저인 3.5%까지 떨어졌다.

당시 걸림돌은 탄핵 사태였다. 지난해 12월 민주당이 이끄는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권력 남용과 의회 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주도하는 상원은 2월 초 탄핵 심판을 기각하고 대통령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원 표결부터 상원 선고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탄핵 심판 기각이었다.

탄핵 심판에 매몰된 사이 미국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상륙했다. 1월 20일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 주민이 처음으로 코로나19로 확진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인들이 코로나19를 정면으로 주시하게 된 것은 3월 들어서였다. 중국에 이어 유럽연합(EU)에서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전국적으로 필수 인력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이동을 제한하는 봉쇄조치(lockdown)를 시행하면서다.

재선으로 가는 열쇠인 경기 호황을 이어가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활동 재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근로자들은 일터로 나오고, 가게는 문을 열고, 학생은 등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코로나19를 경시하는 발언을 잇달아 쏟아냈다.

'전시 대통령'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매일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 브리핑을 직접 했다. 전국 생중계 영상을 통해 "코로나19는 독감 같은 것이다. 독감으로도 미국에서 매년 수만 명이 죽는다"라거나 "살균제를 인체에 주입하면 어떠냐"는 등 발언이 퍼져나갔다. 감염은 들불처럼 번지는데 대통령은 마스크 쓰기를 조롱하고,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유세를 강행하자 부동층은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백악관으로 1000명 이상 초청해 공화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후보자 지명식 등을 성대하게 열었고, 급기야 트럼프 대통령 본인과 가족, 최측근 모두 코로나19로 확진됐다.

2020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해 내년 1월 20일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조 바이든 당선인. [로이터=연합뉴스]

2020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해 내년 1월 20일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조 바이든 당선인. [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19 대응 실패에 실망한 유권자를 파고들었다.

트럼프와 정반대로 늘 마스크를 썼으며, 실내 유세는 일절 하지 않고, 야외 자동차 유세도 소수의 유권자를 초대해 진행했으며, 기부금 모금 행사 등 대부분 일정을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이 같은 행동으로 바이든은 자신을 피난처(safe harbor)로 제시하면서 '엄혹한 겨울'을 헤쳐나갈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분석했다.

지난 5월 백인 경찰에 목을 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도 반(反) 트럼프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경찰의 인종차별적 관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 대도시 거리를 뒤엎으며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로 명명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해져 경찰과 시위대가, 또 트럼프 지지자와 반(反) 트럼프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인종차별을 선동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백인 남성 중심인 자신의 지지 기반을 결집하기 위해서였다.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 단체인 '프라우드 보이즈(Proud Boys)'를 지칭하며 "뒤로 물러서서 대기하라(Stand back and stand by)"고 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평소 투표율이 높지 않았던 흑인 및 유색인종이 대거 투표에 참여했고, 코로나 확산에 불안감을 느낀 대도시와 교외 거주 여성들도 바이든에게 대거 표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선거인단 538명 가운데 바이든은 306명을 확보해, 232명을 확보한 트럼프에 압승을 거뒀다.

2016년 트럼프가 획득한 선거인단 수를 그대로 재현했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 트럼프에게 내준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를 모두 탈환해 북동부 공업지대에 '블루 월(Blue wall)' 재건했고, 공화당 텃밭인 남부의 애리조나와 조지아까지 가져갔다.

하지만 바이든 당선인은 사전 여론조사에서 예상됐던 '블루 웨이브(민주당 바람)'는 일으키지 못했다. 압승할 것이라는 여론조사와 달리 위스콘신(0.7%포인트), 펜실베이니아(1.2%포인트), 미시간(2.8%포인트)의 지지율 격차는 크지 않았고, 조지아(0.2%포인트)와 애리조나(0.3%포인트)는 각각 1만여표 차이에 불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예고한 대로 좋은 패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폭스뉴스의 크리스 월리스 앵커가 '당신은 품위 있게 패배를 인정할 것인가'라고 묻자 "상황에 따라 다르다"면서 "우편투표는 선거를 조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해 불복 가능성을 시사했다. 월리스 앵커가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냐'고 되묻자 트럼프는 "두고 봐야 한다"며 "단순히 '예',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국 대선은 대통령 선거인단 538명 가운데 절반인 270명을 먼저 확보하는 후보가 승자로 선언된다. 개표 결과를 자체적으로 집계하고 분석하는 AP통신, ABC뉴스, 폭스뉴스, CNN 등 언론사들은 개표를 더 진행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시점에 후보의 승리를 발표한다. 보수 언론인 폭스뉴스를 비롯해 모든 언론이 투표 후 나흘째인 11월 7일 바이든 후보가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투표가 조작됐다. 내가 크게 이겼다"고 주장하며 불복하고 있다. 대선 이후 첫 대중 유세였던 지난 5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 지원 유세에서 "만약 내가 졌으면 매우 품위 있는 패자가 됐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나는 이겼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과 달리 각 주 법원과 연방 대법원은 줄줄이 트럼프 대통령과 선거캠프, 그를 지지하는 주 정부가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고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승리 연설에서 갈라진 국민의 화합을 강조했다. 바이든은 "서로를 악마로 대하는 이 암울한 시대를 지금 여기서 끝내자"면서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앞에 놓인 취임 첫해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은 의회 선거에서 하원은 의석을 더 내주고, 상원도 뒤집지 못했다. 바이든 행정부 초반 의회와 공화당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왼쪽부터 중도 우파, 일부 공화당 인사들까지 '빅 텐트' 아래로 모여 정권 교체를 이뤄낸 만큼 내부 분열과 제 몫 챙기기도 경계 대상이다. 미국 첫 여성 부통령 당선인 카멀라 해리스를 배출하고, 성별·인종·계파·성 정체성 등을 두루 안배해 장관 인선을 했지만, 거의 모든 진영에서 불만이 터져 나온 게 한 예다.

바이든 당선인이 취임하는 1월 20일이면 '트럼프 대통령 시즌 1'은 막을 내린다. '트럼프 시즌 2'는 일단 불발됐다. 하지만 "시청자" 7400만 명(트럼프를 뽑은 유권자)이 시즌 2를 방영해 달라는 의사를 표시한 만큼 2024년 대선에 트럼프가 출마해 '징검다리 재선'을 노릴 가능성은 남아있다고 영국 채널4 방송이 전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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