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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소설로 번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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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상을 덮친 바이러스,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적 상상력 자극 

왼쪽부터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이카보그』 『바이러스 X』 『2021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사진 각 출판사]

왼쪽부터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이카보그』 『바이러스 X』 『2021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사진 각 출판사]

“2020년 겨울,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 지역뿐 아니라, 일본이, 아니, 전 세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블랙 쇼맨…』 #발길 끊긴 관광지 살인사건 추적 #김진명 『바이러스 X』 #팬데믹 둘러싼 국제 갈등·음모론 #현대문학상 최은미 『여기 우리…』 #코로나로 개점휴업 워킹맘의 기록

지난달 30일 전 세계 동시 출간된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알에이치코리아) 내용 일부다. 지난달 6일 나온 김진명 작가의 새 장편소설  『바이러스 X』(이타북스)는 코로나19 확산 책임을 둘러싼 미국·중국 간 국제 갈등이 또 다른 바이러스 팬데믹사태로 이어지리란 음모론을 펼쳤다. 올 3월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 공식 선언 8개월 만에 코로나19가 소설 속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두 작품은 지난 12월 셋째 주(16~22일) 교보문고 소설 판매 순위에서 차례로 3, 9위에 올랐다.

지난 18일 국내 번역 출간된  『이카보그』(문학수첩 리틀북)는 ‘해리 포터’ 작가 J K 롤링이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힌 아이들을 위해 10년 넘게 미완성 상태이던 작품을 인터넷에 무료로 연재·완결한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새로운 수수께끼 풀이 방식을 시도한 작품”(작가의 말)이라 한  『블랙 쇼맨…』은 2021년이 무대다. 코로나 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지방 관광도시에서 존경받던 은퇴한 중학교 교사가 제자들과 모임을 앞두고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교사의 딸 마요와 동생인 전직 마술사 다케시가 함께 범인 찾기에 나선다. ‘블랙 쇼맨’은 마술사 시절 다케시의 예명. 천재 물리학자인 탐정 갈릴레오, 가가형사 등을 만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탐정 캐릭터다. 코로나19로 타격받은 일본 사회 근미래를 내다본 묘사도 눈에 띈다.

“가령 ‘도쿄도에서 다른 현으로 이동을 삼갈 것’이라는 요청이 발령되면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등 일본의 현 상황을 짐작할 만한 설명에, “코로나로 인한 폐렴 치료법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유효한 백신도 개발 단계에 있다고 했지만 과거의 활기가 되돌아올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그것이 국민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같이 등장인물 속마음에 새긴 작가의 울적한 전망도 엿보인다.

마요가 다케시와 아버지의 살해 단서를 찾으려 생전 행적을 되짚는 여정은 코로나19 확진자 동선을 통해 가까운 누군가의 진면목을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과도 겹친다. 이미 “고무줄을 끊어지기 직전까지 힘껏 당겨놓은 듯”했던 부부관계가 경제난과 재택근무로 최악으로 치닫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이미 세상사에 존재하던 고름을 짚어내는 족집게이자, 현미경의 역할을 한다. 동시대와 유연하게 호흡하며 사람의 마음을 주목해온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코로나 시대 포착이다.

『바이러스 X』는 1993년 북핵 위기 속 450여만부 이상 판매된 데뷔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부터 시사 현안을 신속히 다룬 김진명 작가가 코로나19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이다. 김 작가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염기서열로 이뤄진 “약 3만 바이트의 데이터일 뿐”이며, 첨단 반도체 기술로 체외에서 이를 인식해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질방관리청 소속 병리학자 연수가 미국에서 온 의문의 남자 정한과 함께 또 다른 바이러스 사태를 파헤치는 다국적 활약을 그렸다.

미국·영국 등 시민 1만 명이 코로나19 확산 책임을 물어 중국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우한연구소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공동 실험 등 코로나19에 관련된 실제 사건들에 더해, 실존 국가·기관·기업 등의 실명도 과감하게 썼다. 특히 체외 바이러스 검출기 개발에 대해선 “나라면 이 어마어마한 정보를 즉각 삼성전자에 알려주고 한밑천 잡을 것”이란 언급까지 나온다. 김 작가는 지난달 18일 한 인터뷰에서 “현대의 나노, 정보통신, 레이저 기술 등으로 바이러스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데 전세계가 인식을 못 하고 있다”라며 “삼성전자를 콕 집어쓴 것도, 이런 기술을 모두 갖춘 삼성전자가 인식의 전환을 못 하고 있기에 전하는 일종의 질타인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제66회 현대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한 최은미 작가의  『여기 우리 마주』도 ‘마스크 이후’ 세상을 담았다. 막 개업한 공방이 코로나로 개점휴업상태가 된 워킹맘인 ‘나’와 이웃 언니  수미의 이야기다. “수미는 자신의 재난지원금을 나에게 와서 썼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수미를 만날 수 없다”는 ‘나’의 어지러운 마음들은 일상들을 돌고 돌아 “수미는 기정시 67번 확진자가 되었다”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예심에 참여한 소설가 김성중은 “코로나 현실을 포착한 소재가 우선 눈길을 끌지만 이 작품은 세태 소설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심사평을 남겼다.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던 최은미 작가는 “‘안전’이라는 말을, 못 견딜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말이 누군가에겐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세상을 점점 좁게 만드는 방식으로 가 닿는다는 것이 2020년 봄을 기록하면서 가장 아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사스·메르스 등을 겪으며 편혜영의  『재와 빨강』,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처럼 방역문제를 고찰한 소설들이 있었다”면서 “내년 봄 정도엔 (코로나19를 다룬 더 많은 순문학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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