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인종차별 논란 확산…퓰리처상 작가도 저격

중앙일보

입력 2020.12.27 14:31

업데이트 2020.12.27 15:07

'버닝' '옥자'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연출한 한인 이민자 가족영화 '미나리'.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갈라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버닝' '옥자'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연출한 한인 이민자 가족영화 '미나리'.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갈라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미나리’는 한국어를 쓰는 이민자에 대한 영화다. 그렇다고 ‘미나리’를 ‘외국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24일(현지시간) 베트남계 미국인이자 퓰리처상 수상작가비엣 타인 응우옌이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칼럼 제목이다. 응우옌은 “‘미나리’ 감독인 리 아이삭 정(한국명 정이삭)은 미국인이고, 미국인 배우를 캐스팅했으며 미국에서 제작됐다”면서 “이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결정은 ‘외국적’으로 만드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고 짚어냈다.
재미교포인 정 감독이 자전적 가족 이민사에 바탕해 쓰고 연출한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 전초전으로 불리는 내년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된 사실이 23일(현지시간)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바다. 이 시상식을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는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영화로 규정한다. 1980년대 아칸소 시골마을의 한국 이민자 가족을 그리면서 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미나리’는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의 영화사 플랜B가 제작하고 재미교포인 주연 배우 스티븐 연이 공동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미국 영화임에도 이런 규정 탓에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계 이민자 가족 영화 '미나리'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분류에
美현지서도 '인종차별주의' 비판
WP 칼럼 "미국적인 것 기준" 반문

응우옌 "영어·백인만 미국적인가" 

응우옌은 자신도 1975년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가 집에서 베트남어를 쓰고 친구 모두가 베트남인이지만 미국에서 집을 사고 세금을 낼 만큼 영어를 충분히 알고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또 “45년이 지난 뒤 영어가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이들이 외국인이냐”라고 반문했다. “언어가 ‘외국적’의 기준이 된다는 주장은 미국에서 백인에겐 사실일 수 있지만 아시아계는 영어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듯하다”면서“‘영어’ ‘미국’ 자체가 단지 ‘백인임’과 엮일 때가 있다”라고 피부색의 문제를 짚었다.
미국적이라고 판가름하는 기준을 되묻는 응우옌 칼럼의 반향은 영국 언론까지 이어졌다. 가디언은 26일 이 칼럼을 기사로 다루며 특히 인종문제 부분에 주목했다. 응우옌이 ‘미나리’를 가장 ‘미국적인 영화감독’으로 조명돼온 유대계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한 가정과 비교한 대목이다.

스필버그가 유대인 영화 만든다면?

응우옌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디시어(유럽에서 쓰는 유대어) 대사가 대부분인 유대인 이민자의 경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그는 아마 이 영화가 미국 얘기라고 HFPA를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게 맞다”면서 이어 “‘미나리’와 다른 점은 스필버그는 당연히 미국인이고 정 감독은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항상 외국인 취급을 받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배경을 지닌 젊은 영화제작자라는 사실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미국인 가족의 얘기를 다룬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독일어와 불어가 대부분 나오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에 올라 상까지 받았다면서 “도대체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지탄했다.

올초 아시아계 배우 아콰피나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룰루 왕 감독의 영화 '더 페어웰'. [AP=연합뉴스]

올초 아시아계 배우 아콰피나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룰루 왕 감독의 영화 '더 페어웰'. [AP=연합뉴스]

지난해에도 중국계 미국인인 룰루 왕 감독이 중국계 이민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페어웰’이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된 터다. 주연 아콰피나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외국어영화상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게 돌아갔다. 당시 수상소감에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시라” 했던 봉 감독의 ‘기생충’은 이어 언어 규정이 없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각본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아카데미 역사를 다시 썼다. 골든글로브의 이번 ‘미나리’ 사태가 더더욱 시대착오적이라 지탄받는 까닭이다.

美언론, 골든글로브 고무줄 규정…'인종차별주의'

할리우드리포터‧벌처‧데드라인 등 현지 매체들도 비판적 보도를 쏟아냈다. 버라이어티는 “영화 ‘바벨’이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영어 비중이 낮은 데도 작품상에서 경쟁했고 심지어 ‘바벨’은 2006년 작품상을 탔다”면서 골든글로브의 고무줄 규정을 지적했다. 미국 대중문화 매체 페이스트 기자 제이콥올러는 골든글로브 규정이 ‘인종차별주의’라고 꼬집었다.

올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미나리' 정이삭 감독과 출연진이 영화제가 열린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엔터테인먼트위클리]

올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미나리' 정이삭 감독과 출연진이 영화제가 열린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엔터테인먼트위클리]

응우옌은 이번 칼럼에서 영화 ‘기생충’과 BTS‧블랙핑크 등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예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한국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의 정수라며, ‘기생충’의 성공이 비영어 영화를 주류와 분리하려는 미국 미디어와 연예 산업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고도 분석했다.

한예리‧윤여정 등 한국배우도 다수 출연한 ‘미나리’는 지난 2월 선댄스영화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 미국영화 부문 관객상을 차지한 후 플로리다비평가협회 각본상, 덴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스티븐 연) 등에 수상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윤여정이 보스턴비평가협회‧선셋필름서클어워즈 여우조연상을 잇달아 받았다. 한국에선 지난 10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된 데 더해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내년 2월 28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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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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