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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첫 사용한 마사초, 인간 감정 리얼하게 묘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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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호 26면

미학 산책 

마사초의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1426~1427), 프레스코, 230x162㎝.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교회]

마사초의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1426~1427), 프레스코, 230x162㎝.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교회]

그림을 음미하려면 우선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한다. 하던 일을 잠시 제쳐 두고, 화집을 펴 놓고 그림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을 알아내거나 어떤 주제를 포착하겠다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이런 의지나 열망과도 거리를 둔 채, 그저 그림의 요모조모를 살펴보고, 이렇게 살펴보는 일 자체를 하나의 휴식으로, 일상의 숨돌리기로 삼는 것이다.

우리의 삶 더욱 다채롭게 표현 #완벽한 3차원 배경 속 생기 넘쳐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엔 이웃 아픔 #‘성삼위일체’는 삶의 유한성 깨우쳐

관찰은 그림에 대한 감상이자 이 그림을 살피는 주체 즉,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이렇게 그림의 풍경과 그 그림을 보는 나의 풍경은 서로 만난다. 이런 점에서 좋은 그림은 예외 없이 사물의 복잡다단한 결(texture)과 무늬, 그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삶은 이런 뉘앙스들의 집적물에 다름 아니다.

마사초, 화가 조토의 참된 제자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감상이란 뉘앙스 훈련에 다름 아니다. 이 뉘앙스의 진폭과 깊이에 따라 우리의 감정도 좁아졌다가 넓어지고, 사고나 의미도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실은 크고 작은 뉘앙스의 복합체계다.

이런 사실주의적 경향은 회화사에서 보면, 처음부터 자명했던 것이 아니라 치마부에나 조토 같은 화가들을 거치면서 비로소 나타난다. 말하자면 1200~1300년대를 지나면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 인식의 변화를 추동한 것은 감정의 변화다. 핵심은 감각과 정서와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여기에는 모든 지상적인 것들 - 눈에 드러나고 손에 만져지며 귀에 들리는 것들 - 지각적 경험과 육체적 사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있다. 사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육체적인 것에 대한 이 같은 존중은 더 넓게 보면, 모든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근대의 휴머니즘은 바로 이 거대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잔물결일 뿐이다.

사실적, 경험적 정신의 조류 속에서 나무나 바위나 언덕도 이제부터는 정감 있게 묘사되고, 성모를 받치던 육중한 옥좌도 차츰 사라지며,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주변 인물도, 그래서 천사까지도 더는 상징적으로나 양식적으로만 첨가하듯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실감 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즈음의 어떤 그림에는 창문마다 빨래가 널려 있고, 새장이 걸려 있으며, 사람들이 문가에서 환담하는 모습도 담긴다. 그러니까 기원 이후의 회화사만 치더라도 1000여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인류는 마침내 ‘자신의 일상생활’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혁신의 의의는 기술적 차원에 그치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앞서 적었듯이, 인간에 대한 이해나 감정에 대한 일정한 시각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화가의 감수성에 의해 감정과 정서가 풍부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감정의 솔직한 표현은 솔직한 감정 없이 표현되기 어렵다. 그렇게 표현되는 감정에는 도덕이 이미 들어있다. 감정의 미화를 거부하는 일 자체가 어떤 정직성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원근법적 구성으로 유명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1425~1428), 프레스코, 667x317㎝.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원근법적 구성으로 유명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1425~1428), 프레스코, 667x317㎝.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현실시각의 이처럼 과감한 변화 뒤에 등장하는 화가가 곧 마사초(1401~1428)다. 조토가 치마부에의 제자로 일했듯이, 마사초는 조토의 참된 제자였다. 인간의 감정은 마사초에 이르러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드러나고, 그 육체는 생기가 넘치며, 건물들은 보다 완벽한 3차원의 배경 속에 자리한다. 원근법적으로 고안된 이런 그림에서 사람과 사물은 소실점을 향해 비례적으로 작아진다. 이 원근법적 화면구성에 그 시대의 수학과 기하학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마사초의 그림에 나오는 이런저런 인물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겨 음미한다. 그의 그림에 대한 나의 경탄은 이 인물들을 그린 화가 자신에 대한 경탄이다. 나는 마사초를 흠모하고, 그의 그림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 안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려져 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건 ‘수련자 세례’건,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건 ‘재물분배와 아나니아스의 죽음’이건, 1424년에서 28년 사이에 그려진 이 모든 그림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누구는 무릎을 꿇고 있고, 누구는 고개를 숙인 채 탄식하며, 누구는 머리를 들어 울부짖는다. 또 누구는 아이를 안은 채 앞을 가만히 응시한다.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이 자리하는가?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있게 될 것인가?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는 베드로가 지나가면서 그림자로 병자를 낫게 하는 장면이다. 그의 뒤 건물은 원근법적으로 완벽하게 그려진다. 이 그림에서 내 시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데는 왼편의 두 병자다. 한 사람은 다리가 마비된 듯 바닥에 쪼그린 채 앉아 있고, 그 옆 노인은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두 손을 모으고 애원하는 듯하다. 그 옆의 수염 기른 사람은 베드로 덕분에 이미 치유된 듯이 스스로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그가 두 손을 모은 것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들의 표정이나 자세는 얼마나 생생하고 진실하게 보이는지! 그들은 오늘날에도 편재하는 우리 이웃의 고통을 잘 대변하는 듯하다.

2차원 회화에 3차원 공간 창조

또 다른 그림 ‘성삼위일체’(1427)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프레스코화로서 원근법적 구성 때문에 명성이 자자한 작품이다. 마사초는 도나텔로로부터 조각과 돋을새김(陽刻) 기술을 배웠고, 이 원근법적 기술로 2차원적 회화평면에 3차원적 허구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는 브루넬레스키가 발전시킨 건축학적 선원근법도 받아들여 회화에 과감하게 적용시켰다. 이 ‘성삼위일체’는 예수의 십자가상이 실제로 건물 안에 걸려 있고, 이 그림을 보는 관객으로서 우리는 이 건물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삼위일체의 프레스코화가 아니라, 이것도 물론 거장적이긴 하지만, 그 아래 있는 석관(石棺)이고, 이 석관의 해골 위에 적힌 글자다. 이 단회색 석관에는 죽은 사람의 전신 뼈대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글의 내용이다.

‘Io fu già quel che voi siete, e quel chi son voi anchor sarete.’ (한때 나는 지금의 당신들이었고, 당신들도 언젠가는 지금의 내가 될 것이다.)

죽은 자는 아담이다. 그러니 이 해골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는 전언과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예수 십자가도 인간의 죽음을 상기시켜 준다. 모든 죽음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의 삶을, 이 삶의 유한성을 잊지 않게 한다.

우리의 삶은 ‘한때의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지금의 삶은 ‘언젠가의 삽화’로 기억될 것이다. 현재를 채우는 크고 작은 그 많은 것들 가운데 과연 무엇이 남을까? 무엇이 비와 바람과 먼지의 내습을 견뎌 낼까? 아마도 구원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 ‘한계’를 헤아리게 될 때, 가끔 혹은 아주 드물게 찾아들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이 한계는 다시 가능성 속에서만 조금씩 가늠될 수 있을 것이다.

문광훈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수영론, 김우창론, 페터 바이스론, 발터 벤야민론 등 한국문학과 독일문학, 예술과 미학과 문화에 대해 20권 정도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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