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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칼망 할머니의 삶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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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경록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대표

김경록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대표

주택연금 가입 조건을 시가 9억원 이하 주택에서 공시가 9억원 이하로 완화하는 등의 법안이 11월 1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번 개정으로 주거용 오피스텔도 주택연금 대상으로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부부 중 한 명이 사망하는 경우 연금수급권이 배우자에게 자동으로 승계되는 장치도 마련되었다. 주택연금 제도가 꾸준히 개선되면서 노후 자산의 80%를 주택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위 주택만 있고 현금은 없는(house rich cash poor) 우리나라 가계에 좋은 노후자산관리 수단으로 정착되고 있다.

90세 주택연금 든 잔 칼망 #무려 32년 동안 연금 받아 #기대수명 편차 확대될 미래 #재테크 앞서 자산구조 짜야

이미 50여년 전에 노후에 주택과 연금을 교환하는 아이디어를 실천한 사람이 있다. 잔 루이즈 칼망은 187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22년 164일을 살았다. 84세에 펜싱을 시작하고 114세에 영화에 출연했다. 더 놀라운 것은 90세에 사적인 주택연금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부유한 집에 태어난 칼망은 90세가 되어 돈이 부족해지자 47세가 된 이웃집 변호사와 계약을 맺었다. 칼망이 사망하면 변호사에게 집을 주고 변호사는 칼망에게 죽을 때까지 매월 2500프랑을 준다는 내용이다. 주도면밀하게도 칼망은 자신보다 43세가 어린 변호사가 먼저 죽으면 그 가족이 생활비를 대신 지급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당시의 변호사 입장이라면 이 계약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칼망의 나이로 보건대 계약 다음날 사망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 후 30년이 지나도 칼망은 120세로 건재하고 오히려 변호사가 77세로 먼저 사망했다. 변호사는 충분히 살았다. 칼망이 예상외로 너무 오래 살았을 따름이다. 결국 변호사 가족이 2년 동안 생활비를 준 뒤에야 칼망의 집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하겠지만 우리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앞으로 맞게 될 장수시대의 문제는 단순히 수명이 길어지는 게 아니다. 칼망처럼 수명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수명이 110세까지 길어진다고 하더라도 99%가 그 나이 전에 죽으면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노후설계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10% 정도가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인간 수명은 115세가 최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브레이 드 그레이(Aubrey de Grey)는 10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최대 기대수명이 115~1000세로 편차(偏差)가 크게 확대되다 보니, 수명을 몇 살까지 예상하고 노후설계를 해야 할지 혼돈스럽고 불확실하다.

은퇴와 투자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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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확실성을 개인이 감당하기는 어렵다. 불확실성을 이전시켜야 하는데 종신연금이 그 기능을 담당한다. 내가 보험료를 기관에게 지불하면 나에게 연금을 주는 식이다. 그중 주택을 맡기고 종신토록 연금을 받는 게 주택연금이다. 칼망의 예는 주택연금의 본질을 말해준다. 칼망은 주택연금 가입자에 해당되며 변호사는 연금을 지급하는 주택금융공사의 역할을 한다.

다만, 칼망의 예와 달리 주택연금은 연금을 주는 상대방이 주택금융공사라 국가 신용을 갖고 있다. 칼망이 자신도 예상치 않게 오래 살았지만 영화도 출연하는 등 여유롭게 산 것은 자신이 맺은 연금 계약 때문이었다.

덧붙여, 주택연금은 가계의 노후자산 구성을 안전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다. 주택은 가격이 오를 수 있지만 하락할 수도 있다. 가계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택가격이 크게 하락하기라도 하면 노후에 낭패다. 일본의 예를 보면, 우리나라 주택가격은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주택연금은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주택금융공사로부터 연금을 받는 것이기에 마치 국채를 보유한 것과 마찬가지다. 주택가격이 하락하더라도 처음 약정한 연금액을 국채 이자처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택연금은 주택자산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가계자산을 국채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주택연금을 통해 우리는 약간의 보험료를 지불하고 수명 편차가 확대되는 장수리스크와 주택가격이 하락할 수 있는 시장리스크를 국가에 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잔 칼망은 변호사에게 미안했는지 ‘누구나 잘못된 계약을 할 때가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계약 하나가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진정한 노후 재테크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자산의 구조를 지혜롭게 짜는 데 있다.

김경록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