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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귀로 쓴 ‘합창’ 듣고, 코로나 시련 이겨내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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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호 18면

베토벤이 2020년 세상에 띄우는 편지

악성(樂聖)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인 올해, 세상은 무대의 환희 대신 역병의 창궐로 신음하고 있다. 장애를 이겨낸 음악가는 우리에게 어떤 응원을 해줄까. 클래식 전문가가 편지 스타일로 재구성했다.

귀 안 들리면서 밑바닥까지 추락 #‘이렇게 죽지 않겠다’ 의지로 극복 #10년간 ‘전원’ 등 걸작 만들어 #시련에 굴복 않고 정면승부하면 #‘운명’ 4악장처럼 서광이 비칠 것

독일관광청이 마련한 베토벤 탄생 250 주년 포스터.

독일관광청이 마련한 베토벤 탄생 250 주년 포스터.

작년 이맘때부터 예고편이 요란했지. 기대가 컸네. 전 세계의 무대가 내 250번째 생일잔치로 1년 내내 성대할 거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으니까.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나. 이토록 요상한 질병이 이렇게 유행할 줄 말이야. 전 세계 방방곡곡 공연들이 취소되기 시작했지. 연말 인기 레퍼토리인 교향곡 9번 ‘합창’ 공연도 찾아보기 힘들더군. 합창단이 노래하면 비말이 날려서 더 위험하다나. 마르쿠스 슈텐츠와 서울시향이 관객 하나 없이 연주하는 ‘합창’도 봤어. ‘비대면 음악회’라더군.

문득 초연되던 날이 떠올랐어. 귀가 안 들려서 끝난 줄도 몰랐는데,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나를 돌려세워 객석의 청중을 봤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격하게 환호하는 그들의 표정과 손뼉 치는 동작을 보고 흐뭇했던 게 생각나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루이 레트론이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루이 레트론이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이번에 서울시향 공연을 모니터로 보니 4악장 피날레가 끝나고 초연 때 봤던 환호하는 청중은 볼 수 없었네. 그야말로 먹먹한 무음의 진공상태였지. 무대 위의 그들이 아주 잠깐 슬퍼 보였네. 음악가들에게 박수와 환호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 느낌 아니까.

객석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은 아주 작은 걸 거야.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말이지. 쏟아지는 확진자와 중증 환자들을 돕느라 사투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강제로 사업장 문을 닫고 임대료와 세금 걱정하는 자영업자들, 학교에 가고 싶어도 원격 수업만 해서 친구들이 낯선 학생들, 이 모든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우울증을 ‘코로나 블루’라고 한다지?  알아. 나도 심하게 우울했던 적이 많았다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스물여섯부터 귓병을 앓았어. 고향인 본을 떠나 빈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였지. 언제부턴가 슈테판 대성당의 종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그리고 못 듣는 사람은 나뿐이란 걸 알았지. 들리는 것들은 점점 희미해져 갔지. 별의별 요법을 다 써봤어. 아몬드 기름을 귀에 바르고, 약초도 문지르고, 전기 요법도 썼다니까.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요한 슈테판 데커가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요한 슈테판 데커가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내 교향곡 1번을 초연했을 때가 그즈음이었네. 존경하는 하이든 선생님과 모차르트 선배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도 나왔고, 슈베르트·슈만·멘델스존·브루크너·말러 같은 후배들이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교향곡 장르 아홉 곡의 시작을 알린 출발점이었지. 경제적으로도 풍족했을 때였네.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의뢰를 받았고, 곡 하나에 출판사 예닐곱 군데가 붙었으니까. 그러나 이놈의 귀가 문제였단 말일세. 명성과 청력이 하루가 다르게 반비례하던 시절, 그때 내 심정이 어땠겠나?

의사 선생님은 조용한 곳에서 요양을 권했지. 나는 빈 근교에 있는 하일리겐슈타트로 갔네. 상황이 좋아지길 기대했지만, 소용없었지. ‘나’라는 우주가 허물어져 가는 느낌 속에서 주변의 수려한 경관도 청력처럼 희미해져갔어.

우울감은 더 커졌고, 나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 펜을 들었네. 동생 카를과 요한이 수취인이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어. 훗날 사람들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 부를 정도로 지독한 절망도 내비쳤지만, 사실은 쓰면서 점점 또렷해진 생각이 있었지. 잘 들리는 소리처럼 말이야. 그것은 바로 ‘결코 이렇게 죽지 않겠다’는 의지였어. 오직 예술만이 나를 지탱해주었고, 원하는 것들을 만들 때까지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여러분도 힘든 일이 있으면 그걸 종이에 적어보길 권해. 하나둘 생각이 정리되면서 단순해지거든.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게르 하르트 부르거가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베토벤 초상화. 게르 하르트 부르거가 그린 베토벤. [사진 풍월당]

어찌할 수 없는 추락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는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살 힘을 얻었어. 그리고 그 의지를 오선지에 즉시 옮기기 시작했지.

유서 같은 편지를 쓴 이듬해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쓰기 시작했고, 그 뒤 10년간은 내가 생각해도 걸작들이 줄줄이 나왔다네. 로맹 롤랑이 ‘걸작의 숲’이라 말했던 그 시기지. 교향곡·서곡·협주곡·피아노 소나타·바이올린 소나타·기타 실내악 곡 대부분을 이때 썼네.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 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등은 절망과 좌절의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오른 나의 혼들이라네. 음악은 재주와 기예로 처리하는 직능이 아니라 철학적 눈높이를 요구하는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온전히 음악만으로 말이야. 암흑과 진창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등불 같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되길 나는 원했어.

“짜짜짜 잔”하고 시작되는 ‘운명’ 교향곡은 어느 날 문을 두드리는 운명의 얄궂음으로 시작하지. 누구든 불현듯 운명의 펀치를 맞게 되어있어. 예고도 없고 예외도 없다네. 일은 꼬이고 갈등은 깊어지지.

그러나 우리는 인간임을 그리고 숭고한 존재임을 명심하고, 시련과 정면 승부를 해야 해. 그러면 4악장처럼 서광이 비치고 승리하게 되지. 죽음까지 생각했던 나지만, 인류가 시련에 굴복하길 원치 않았어. 교향곡 6번 ‘전원’에서 4악장에 천둥 번개가 매섭게 몰아치잖아. 참고 견디면 먹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뜨지. 곧이어 5악장의 상쾌한 빛과 공기처럼 밀려오는 선율을 들으면, 보고 듣고 느끼는 삶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네.

베토벤 사인

베토벤 사인

내가 생각해도 심오한 작품을 쓰게 된 건 최후의 10년이었지. 그땐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네. 절대 음감을 갖고 있던 나는 마음의 귀로 들으며 곡을 썼어. 작곡에 관해서라면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어. 썼다 고치고 다듬으며 공을 들였지. 교향곡 9번 ‘합창’, ‘장엄미사’, 후기 피아노 소나타, 후기 현악 4중주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됐어.

2020년을 보내는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 중 한 구절이야. “가혹한 관습이 갈라놓은 것들을/신비로운 그대의 힘이 결합시키고/아늑한 당신의 날개가 있는 곳에서/모든 인간은 한 형제가 되리라”는 부분 말이지. 3악장이 끝나고 4악장이 오듯, 지금의 힘든 고난과 슬픔과 절망이 지나가고 좋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절대 버리지 말게. 코로나로 갈라졌던 것이 결합되고, 갈등 겪던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낼 날이 꼭 올 걸세.

몸과 마음이 힘든 날에는, 내 음악을 한번 들어보길 바래. 몸의 귀가 안 들려서 마음의 귀로 쓴 곡들이라 듣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해주는 힘이 있거든. 내가 이겨냈듯, 여러분도 이겨낼 거야. 암, 할 수 있고말고. 그럼 건투를 비네.

-2020. 12. 25 한국이 보이는 하늘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

탄생 250주년 베토벤, 내년에도 ‘잔치’ 이어져


현재 나와 있는 2021년 클래식 공연 프로그램을 보면 베토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250주년인 2020년 부럽지 않다. 예정대로 무사히 치러지길 기대하며 베토벤의 늦은 생일상들을 살펴본다.

2021년의 베토벤 무대는 김선욱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1월 1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30, 31, 32번을 연주한다. 12일 역시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해 ‘에그몬트 서곡’ 등을 연주하며 본인의 공식 지휘 데뷔 테이프를 끊는다. 이날 김선욱은 피아노 협주곡 2번도 협연한다. 김선욱은 또 9월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세 차례에 걸쳐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금호아트홀 연세는 ‘베토벤의 시간’이란 이름의 프로그램을 따로 구성했다. 3월 25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과 피아니스트 이진상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한다. 한국인 최초 전곡 앨범을 발매한 이들의 생생한 실제 연주 무대다. 6월 10일과 17일에는 피아니스트 프랑수아 프레데리크 기, 12월 9일과 16일에는 김다솔이 각각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에 마침표를 찍는다.

5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이고르 레비트의 첫 독주회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로 장식된다. 소니에서 발매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으로 각광 받았던 레비트는 8번 ‘비창’,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5번 등 굵직한 소나타 작품들을 연주한다.

5월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는 20세기의 거장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선다. 84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2011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로 내한한 적은 있지만 내한 독주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만 5종을 발매한 바 있는 달인은 역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을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

고음악 거장 필립 헤레베헤와 그가 이끄는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는 5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등을 연주한다.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은 6월 초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다섯 차례 공연으로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을 완주한다.
6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는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5년만의 리사이틀 프로그램 중에는 베토벤 ‘열정’ 소나타가 들어있다.
9월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리사이틀이 열린다. 에마르는 베토벤 ‘월광’ 소나타와 바가텔 등을 연주한다.

9월 18일과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현존 최고의 베토벤 권위자 루돌프 부흐빈더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다섯 곡 전곡을 완주한다. 정상급 실내악단인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를 직접 지휘하며 피아노를 연주할 이 공연은 살아 움직이는 베토벤을 체험할 좋은 기회다.

10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로빈 티치아티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다.
11월 첼리스트 문태국과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리사이틀에서도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등이 예정돼 있다.

글 류태형 음악 평론가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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