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가 희생해야 모두가 행복? 입장 바꾸는 연습 필요”

중앙일보

입력 2020.12.25 10:00

‘며느라기’에서 초보 며느리 민사린(박하선)이 시어머니 생신상을 차리고 있다. [사진 카카오TV]

‘며느라기’에서 초보 며느리 민사린(박하선)이 시어머니 생신상을 차리고 있다. [사진 카카오TV]

“우리는 왜 자발적 며느라기가 되었나.”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 연출을 맡은 이광영 PD가 처음 수신지 작가의 원작 웹툰을 접했을 때 한 생각이다. 결혼 초기 친구가 보내준 캡처 장면을 받아든 그는 격하게 공감했다. 극 중 막 결혼을 한 민사린(박하선)이 “내가 희생해야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아서” 시댁 제사부터 시부모님 결혼기념일까지 앞장서서 챙기고 “내가 이렇게 해야 우리 부모님이 욕을 안 먹을 것 같아서” 부모님과도 못해본 찜질방 나들이까지 마다치 않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스트레스 받는” 자신과 겹쳐진 탓이다. 드라마 역시 섬세한 연출로 공감을 끌어내면서 새로운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매회 150만회 안팎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웹툰 원작 섬세하게 풀어낸 이광영 PD
“왜 자발적 며느라기 됐나 문제의식 공감
이유없이 무조건 나쁘고 착한 사람 없어
어쩌다 지금에 이르게 됐을까 생각해보길”

‘며느라기’ 제작발표회. 왼쪽부터 남편 무구영 역의 권율, 시어머니 박기동 역의 문희경, 민사린 역의 박하선, 이광영 PD, 시누이 무미영 역의 최윤라, 손위 동서 정혜린 역의 백은혜. [사진 카카오TV]

‘며느라기’ 제작발표회. 왼쪽부터 남편 무구영 역의 권율, 시어머니 박기동 역의 문희경, 민사린 역의 박하선, 이광영 PD, 시누이 무미영 역의 최윤라, 손위 동서 정혜린 역의 백은혜. [사진 카카오TV]

21일 서면으로 만난 이 PD는 “협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원작 팬으로서 너무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SBS ‘이판사판’(2017~2018), ‘초면에 사랑합니다’(2019) 등을 연출한 그는 “늘 디지털 콘텐트 및 플랫폼에 관한 흥미가 있었다”며 “채널을 돌리다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와서 봐야 하므로 그만큼 타깃을 확실하게 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기존 60분짜리 16부작 TV 드라마가 아닌 20분짜리 12부작 디지털 드라마로 만들면서 “원작의 불편함을 강조하면서도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 요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반짝이던 연애시절 vs 빛바랜 현실 

민사린과 무구영(권율)의 연애 시절. 과거지만 더 채도가 높게 표현돼 있다. [사진 카카오TV]

민사린과 무구영(권율)의 연애 시절. 과거지만 더 채도가 높게 표현돼 있다. [사진 카카오TV]

시댁에 다녀온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연애 시절과 대비를 이룬다. [사진 카카오TV]

시댁에 다녀온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연애 시절과 대비를 이룬다. [사진 카카오TV]

제작진은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결혼 후 현재와 비교되는 연애 시절을 매회 넣는 방식을 택했다. 이 PD는 “보통 드라마에서는 과거 회상 신에서 채도를 낮춰서 세월이 지난 느낌을 표현하는데 ‘며느라기’는 오히려 과거 신이 채도가 높게 색 보정이 되어있고 반짝반짝하게 CG가 들어가서 현재가 더 빛바랜 느낌이 있다”고 설명했다. “민사린과 무구영(권율)에게도 분명히 서로 사랑만 주고받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지금에 이르게 됐을까”를 시청자들도 함께 고민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드라마를 통해서 어떤 가치관이 옳다, 그르다는 답을 주고 싶진 않았어요. 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됐을 때 ‘며느라기’ 속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그때 그런 장면이 있었는데’ 하면서 지금 내가 왜 답답하고 서운한지 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거나 혹은 서로 입장을 바꿔서 상대방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테니까요.”

하여 민사린이 주인공인 점은 변함이 없지만 “‘신데렐라’ 속 계모나 새언니처럼 무조건 못되게 굴거나 생쥐나 요정처럼 무조건 도와주는 사람은 만들지 않고자” 노력했다. 이를테면 매사에 똑 부러지게 선을 긋는 손위 동서 정혜린(백은혜)이나 힘든 일은 올케에게 미루기 일쑤인 시누이 무미영(최윤라)이 너무 얄미워 보이지 않도록 각각의 이야기를 추가했다. 민사린이 겪는 ‘시월드’와 대비되는 무구영의 ‘처월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PD는 “각자의 삶에서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므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것이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자가 만드는 여자 이야기 더 나와야”

시어머니 박기동(문희경)에게 꽃바구니를 건네는 모습. 두 사람의 대화는 거의 주방에서 이뤄진다. [사진 카카오TV]

시어머니 박기동(문희경)에게 꽃바구니를 건네는 모습. 두 사람의 대화는 거의 주방에서 이뤄진다. [사진 카카오TV]

반면 무구영과 시아버지 무남천(김종구)이 주로 머무는 공간은 거실이다. [사진 카카오TV]

반면 무구영과 시아버지 무남천(김종구)이 주로 머무는 공간은 거실이다. [사진 카카오TV]

낙태 문제를 다룬 수신지 작가의 후속작 ‘곤’도 재미있게 봤다는 이 PD는 여성 중심 서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반가움을 표했다. “넷플릭스 영화 ‘어쩌다 로맨스’처럼 예뻐야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틀을 깨고 소위 못생기고 뚱뚱한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끝까지 안 예뻐지는 이야기가 인기를 얻고 있잖아요.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거죠. 너무 오랫동안 많이 만들어진 남자의 시선에서 보는 남자 이야기보다 여자가 만드는 여자 이야기가 더 할 얘기가 많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앞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특히 ‘모던 걸’ 소재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지금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잖아요. 그렇게 급진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진 이야기를 겁 없이 할 수 있었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최근에 화가 나혜석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찾아보면서 공부하기도 했고요.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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