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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 징역 40년 중형에도…’n번방‘ 아직 안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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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피고인 조주빈을 징역 40년에 처한다”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최소 74명의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지난 3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이송되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얼굴을 드러낸 조씨는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스1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최소 74명의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지난 3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이송되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얼굴을 드러낸 조씨는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스1

11월 26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이현주 재판장이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에 대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조주빈에 대해 징역 40년과 신상정보 공개 10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 10년, 전자발찌 부착 30년형이 골자다. 조주빈에 대한 선고는 지난해 11월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ㆍ유포해온 박사방의 존재가 알려진지 1년 만에 나왔다.

[2020 결산]n번방 사건

조주빈의 디지털 성범죄(성폭력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대한 형량은 유기징역 상한이 30년이었지만, 이날 선고는 형을 가중할 수 있는 형사소송법까지 적용해 40년을 내린 것이어서 상당한 중형이라는 분석이다. 조주빈과 함께 기소된 5명의 공범들도 모두 징역 7~15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중형은 법원이 피고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박사방이 조직적인 범죄집단이라고 보고 성범죄 사건에 처음 범죄단체조직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는 조직적 성범죄를 폭넓게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n번방 사건’ 수사 일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n번방 사건’ 수사 일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n번방 '갓갓'이 만들어 '박사방’으로 파생

n번방 사건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n번방 창시자인 ‘갓갓’ 문형욱(24)이 텔레그램 회원들과 조직적으로 아동·청소년 등을 성착취한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문형욱은 2017년 1월부터 텔레그램에 성착취물의 수위에 따라 1~8번방을 만들고 회원을 모집했다. 경찰청 디지털성범죄특별수사본부 관계자는 “성착취물 유통 뿐만 아니라 제작까지 하는 유형이 처음 생겨난 것”이라며 “n번방을 분석해보니 지시하는 사람이 하나씩 겹치더라. 그게 바로 주범인 갓갓이었다”고 말했다.

갓갓의 활동은 지난해 3월 이후로 뜸해졌다. 그 빈 자리를 파고든 게 ‘박사’ 조주빈이다. n번방에서 파생된 조주빈의 ‘박사방’은 공무원 등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빼돌리기도 했다. 법원은 조주빈의 범행 수익 1억 600여만원도 몰수했다. 박사방 범죄수익을 가상화폐로 지급받아 환전하는 방법으로 수익을 감춘 혐의가 인정된 것이다. 박사방이 회원들을 거느리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자 또 다시 이를 모방한 텔레그램방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닉네임 ‘로리대장태범’이 운영한 ‘프로젝트n방’이다. n번방 사건과 함께 성범죄자 등의 신상정보를 임의로 공개한 ‘디지털 교도소’는 사적 처벌 논란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n번방은 디지털 성범죄의 정점"    

이처럼 디지털 세상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제작하고 유포하는 성범죄가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수사기관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모바일 메신저를 통한 비대면 대화의 활성화를 꼽는다. 텔레그램과 같이 보안성을 앞세운 메신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일탈 심리가 극대화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진희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은 “소라넷부터 시작된 디지털 성범죄의 진화된 형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게 n번방 사건”이라며 “원래 온라인상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문화가 기술 발전과 맞물려 정점에 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주빈이 지난 3월 검거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는 중대범죄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23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n번방 사건’ 가해자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원 등에) 순식간에 300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것은 악성 디지털 성범죄를 끊어내라는 국민들의, 특히 여성들의 절규로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24일 조주빈은 검거 8일 만에 성범죄자 중 1호로 신상이 공개됐다. 고유정, 김성수, 안인득 등 기존에도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근거해 신상이 공개된 사례는 있었지만 성폭력처벌에 관한 특례법 조항(제25조)에 따라 공개된 건 조주빈이 처음이다. n번방 사건 관련 피의자 가운데 신상이 공개된 이들은 ‘박사’ 조주빈, ‘이기야’ 이원호, ‘부따’ 강훈, ‘갓갓’ 문형욱에 이어 안승진, 남경읍, 배준환 등 7명이다.

‘n번방 사건’ 주요 가해자 재판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n번방 사건’ 주요 가해자 재판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디지털 성범죄 2838명 검거…소지자 1461명

조주빈에 이어 지난 5월 문형욱까지 검거한 경찰은 유료회원 수사에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올해 4월 29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통과되면서 불법촬영물 소지죄나 시청죄도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경찰청 디지털성범죄수사본부에 따르면 지난 17일까지 디지털 성범죄 관련자 2838명을 검거해 231명을 구속했다. 유형별로 제작·운영자가 463명, 유포자 872명, 소지자 1461명, 기타 42명이었다. 피해자는 1065명으로 집계됐다. 10대가 615명(57.7%), 20대가 269명(25.3%)으로 10~20대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장미혜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가해자 처벌법과 관련해 불법 촬영 유포, 재유포, 소지 등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는 법이 만들어진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디지털 성범죄는 2~3년 전만 해도 강간 등에 비해 형량이 터무니없이 낮았다. 보통 범죄와 달리 디지털 성범죄는 영속적으로 피해 사실이 남아있을수 있는 피해자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디지털 성범죄 생태계를 없애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이를 위해선 경찰 잠입수사를 통해서 범죄를 발본색원하고 그들의 경제적 수익을 유죄 판결 이전에 몰수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n번방 사건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 그루밍 처벌·잠입수사 허용 법안 발의

n번방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가 잠잠해지는듯 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온라인 개인 방송 플랫폼을 통한 아동·청소년의 성착취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고민상담이나 칭찬 등으로 친밀감을 형성한 뒤 성적 행위를 요구하는 ‘그루밍(길들이기)’ 수법의 성범죄다. 지난 7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인터넷 방송 BJ A씨(27)를 방송 도중 알게 된 미성년자 B양을 수차례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로 입건했다. 현재 미성년자가 그루밍 피해를 입었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마땅한 근거가 없는 것도 그루밍이 활개 치는 이유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온라인 그루밍 처벌 체계 마련 및 온라인상에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의 제작·유포·소지 등을 근절하기 위해 잠입수사를 도입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해당 상임위원회에 계류중이다.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은 “수요를 차단하려면 보는 사람도 차단해야 하는데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면 수사기관이 위장 잠입수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체계적·효율적으로 단속하기 위해서 경찰은 내년부터 사이버성폭력수사팀이 상속 단속체제로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는 “플랫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신고 의무를 강화할 방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자신들이 운영하는 플랫폼에서 아동 성착취물이 발견될 때 삭제하고 차단하는 것뿐 아니라 경찰에 신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경찰청이 민간 모니터링 기관과 협업하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유포 협박을 받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심리 상담과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통합 기구도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문희·이우림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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