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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대통령이 광내는 자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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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지인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코로나 확산과 백신 비상이 모두의 어깨를 무겁게 누를 때다.

책임·결정은 밑에 떠넘기고 #없어도 좋을 곳에만 있는 대통령 #산타도, 백신도 없는 성탄 자초

“외환위기 때가 생각나는 아침이네요. 우물쭈물하다 엉망이 돼버렸네요. 깊고 짧게(deep and short), 선제적 대응(preemptive response), 충분하게(enough)가 위기관리의 기본인데! 책임 추궁이 무책임 사회를 만들었고, 책임 체계의 부재가 현실 외면, 무능·무책임 공직사회를 만들었네요.”

그에겐 1997년 외환위기와 맞서 이겨낸 기억이 있다. 이름 대면 알 만한 경제 원로지만 익명을 원했다. 그는 경제 위기든 팬데믹이든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처방도 다를 바 없다. 과감·신속이다. 그래야 회복도 빠르다. “지금 당장 록 다운(긴급 봉쇄)에 들어가야 한다. 보균자는 2주 사이에 확진자가 되거나 나을 것이고, 확진자는 치료될 것이다. (들쭉날쭉한) 영업정지나 제한을 둘러싼 불평불만도 해소하고 보상 기준도 명확해질 것이다.”

외환위기 때 공적 자금 투입을 놓고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논란을 잠재운 건 유명한 소방수론이다. ‘불이 나면 넘칠 만큼 물을 퍼부어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간 골든타임을 놓친다. 소방수가 화재를 진압하다 화단을 밟을 수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단이다. 결단은 누구 몫인가. 그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결단해야 한다”며 한마디를 덧댔다. “밑에 떠넘기지 말고!” 그의 덧말에 십분 공감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코로나 리더십은 실종 상태나 마찬가지다.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다. 문 대통령은 그날 “거리두기 3단계가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면 결단해 달라”고 했다. 결단의 주체가 누군가? 듣는 귀를 의심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대통령이 밑에 떠넘기는 모양새 아닌가. 원래 대통령 말씨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뜨거운 이슈 때도 똑같았다. 부동산은 김현미 장관, 검찰개혁은 추미애 장관 뒤에 숨었다.

그렇다고 은둔의 리더십을 즐기는 대통령도 아니다. 되레 광나는 일엔 빠지지 않는 게 문 대통령 스타일이다. 1차 코로나 위기 땐 청와대에서 짜파구리 파티를 했고 최근까지 각국 정상에게 ‘K방역’을 자랑했다. ‘코로나 정치’ 논란을 자초한 것도 대통령이다. 중국인 입국이나 민주노총 집회는 놔두고 신천지와 태극기 시위는 엄중 봉쇄, 책임을 물었다. 백번 양보해도 ‘코로나 정치’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지난 3월 25일. 문 대통령은 씨젠을 찾았다. 씨젠은 국내 최고의 진단키트 회사다. K방역의 주역이기도 하다. 대통령은 “(씨젠의 기술력이) 대한민국의 자부심”이라고 했다. 뜬금없긴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시기다. 당시는 대구가 코로나에 초토화되던 때다. 사망자만 92명이 나왔다. 60년여 해로한 노부부가 손 한 번 못 잡아주고 남편을, 아내를 불에 태워 보내야 했다. 바로 며칠 전 17살 청소년이 코로나 지옥 대구에서 치료 한 번 못 받고 숨졌다. 그 현장에 대통령은 없었다. 세월호 아이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고 되뇌던 대통령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죽음도 국가가 책임지겠다”던 그의 말은 다른 많은 약속처럼 허언이 됐다. 그 뒤로도 대통령은 단 한 번, 코로나 사망자의 빈소를 찾지 않았다. 발 가는 곳이 마음 가는 곳이다. 진심은 입에 담기지 않고 발에 남는다.

그런 대통령이 며칠 전엔 “백신을 왜 못 구했냐”며 청와대 참모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지금이 그럴 땐가. 짧고 굵게 결단을 내릴 때다. 당장 백신을 구하기 어렵다면 시간을 벌어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멈춰 달라고 말해야 한다. 지금 국민은 백신이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다. 대통령이 없어서 불안하다.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도 좋을 곳에만 있는 대통령 때문에 불안하다. 2020년 성탄 전야, 우리에겐 산타만 없는 게 아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