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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서글픈 캐럴 ‘그래도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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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캐럴 풍 피아노 선율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출근길 라디오 덕분에 크리스마스 무드에 빠져들었다. 친근한 목소리의 가수는 윤종신이었다. ‘참 힘들었죠 올해/돌아보면 어쩜 그렇게도/그럴 수가 있는 건가요~’

4년 전 국민 실망 달랬던 캐럴 #내일에 대한 희망 다시 실종돼 #코로나에 성탄 축배도 참아야

연말 힐링용 신곡이려니 했는데 DJ가 “아, 4년 전 노래였군요”라고 했다. 흥행에 실패했으면 어떤가.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힘들어도 사랑하며 견디자’는 노래라면 지금도 따뜻한걸. 그래서 캐럴이지.

차에서 들은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아 다시 검색해 봤다. 그런데, 가사까지 제대로 음미하려던 성탄 감성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윤종신의 캐럴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12월 9일) 이후 촛불집회를 테마로 만든 노래였다. 서정시 같았던 캐럴이 실은 장엄한 서사시였다니.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원효대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잘했어요~참아 내기 힘든/그 용서할 수 없는 걸/다 함께 외쳤던 그 날들/정말 젠틀했던 강렬했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엔 당시 한국 사회를 실의에 빠트린 주요 사건이 촘촘하게 담겼다. 세월호의 팽목항, 한·일 위안부 협상,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강남역 묻지마 살인, 가습기 살균제, 백남기 농민 사망, 최순실 국정농단과 정유라의 승마 입시 비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과, 촛불 광장 등의 애니메이션 영상이 이어졌다.

노란색 촛불은 팽목항의 리본이 되고 구의역과 강남역의 포스트잇이 되었다가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이 됐다. 윤종신은 당시 “올해 어수선한 일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마스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왔으니 내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건배 정도는 하자는 이야기를 해봤다”고 소개했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그는 “진보·보수, 좌우 정치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선악의 문제다”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련히 떠올랐다. 국정조사, 특검, 대통령 탄핵소추와 헌법재판…. 박 전 대통령의 파면(2017년 3월 10일)을 전후해 기자들은 매일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바빴다. 당시 화제였던 윤종신의 노래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 같다.

그렇게 정권이 바뀌고, 4년이 흘러 다시 듣게 된 캐럴은 처량했다. ‘나아질 거야 내일은/길을 걷다 누구라도/마주치면 같은 맘일걸/Merry Merry Christmas~’라 노래했건만, 그 내일은 나아졌는가. 뮤직비디오에 갈아 끼워도 손색없는 사건·사고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차고 넘쳤다.

일본과의 외교는 파탄 났고 윤미향 사건이 터졌으며, 집값·전셋값이 폭등하고 자영업자들은 폭망했다. 정유라 입시 비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논문 비리 앞에 건전해 보일 지경이다. 발전소에서 일하던 청년이 지하철 구의역의 비정규직 김군처럼 처참히 스러졌다. 김군 죽음에 “걔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됐다”는 망언을 했던 인사가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다. 적폐 청산 영웅은 검찰총장에 올랐다가 정권 실세를 겨누는 바람에 숙청되기 직전이다. 오죽하면 참여연대 출신 김경율 회계사가 “민주당 권력이 촛불을 배신하고 있다”(23일 언론 인터뷰)고 했겠는가.

가장 중차대한 코로나19 확산을 생각하면 “그래도 성탄”은 배부른 소리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고령의 기저질환자가 감염으로 인해 마지막 성탄이 되지 않도록 단합된 멈춤과 대면 모임 행사 취소가 필요하다”(지난 21일 브리핑)고 당부했다. ‘마지막 성탄’이란 끔찍한 말까지 했어야 하느냐고 따질 처지가 아니다. 코로나19가 우리 곁에 조여 들어옴을 느끼기 때문이다. K방역은 말뿐인 전략이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국민 모두에겐 K방역의 전사 역할이 주어졌다. 백신 확보는 애당초 남의 나라 얘기였으니, 과학자가 기댈 것은 K방역 전사의 경각심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총체적 난국에도 정권 실세들은 “백신을 정치화하지 말라”며 대통령 비호에 여념이 없다. 정 본부장의 표현을 빌려, ‘마지막 집권’이 되지 않도록 단합된 멈춤을 권하고 싶다.

어쨌든 이번 성탄절엔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경계 대상이다. 정 본부장은 “성탄절과 신정 연휴의 종교행사와 가족·지인 모임에서 사람 간 접촉을 줄이지 못할 경우 더 심각하게 전염이 확산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 내 옆 거짓말 못 하는/작은 꿈들로 사는 사람들/그들과 건배해/오늘은 그래도 크리스마스~’라는 캐럴조차 위험한 서글픈 크리스마스이브다.

김승현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