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정치지도자가 풍차에 덤벼들면 국민이 불행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24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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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돈키호테와 레임덕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스페인 라만차의 시골 귀족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좋아했다. 밤낮으로 읽다 현실과 소설을 혼동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부정이 횡행하는가. 하루라도 지체하는 건 죄를 짓는 일이다.” 그는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에 다니며 모험하겠다고 나섰다.

꿈을 꿔야 미래를 만들지만
지나치면 국민이 고생이다
현실 모르고 옳은 처방 없어
레임덕 못피하는 제도 고쳐야

모든 현실이 책에서 읽고 상상한 모습대로 변해 있었다. 주막은 성, 하녀는 공주, 수도사는 악당 마법사로 보였다. 종자인 산초가 풍차라고 거듭 말렸지만, 돈키호테는 거인이라며 덤벼들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며 돈키호테의 이상주의에 찬사를 보낸다. 꿈을 꾸어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정치인도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면 별을 쫓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나치면 국민이 고생이다.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현실과 환상의 착각, 공감 능력 결핍…. 돈키호테는 혼자 웃음거리가 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그 피해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돌아간다. 현실을 모르면 옳은 처방이 나올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인은 절대 국민의 손을 놓치면 안 되고, 반발 짝만 앞서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다. 앞서가야 하지만, 너무 나가면 안 된다.

돈키호테는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창은 산산조각나고, 그와 애마 로시난테는 큰 상처를 입고 나뒹굴었다. 자기가 대결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 창을 들고 달려들어야 하는지 헷갈린 결과다.

문재인 정부가 드디어 윤석열 검찰총장 직무를 정지시켰다. 올 1월 3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무려 일 년 동안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해 거둔 전리품이다. 국민에게는 최대의 국정과제가 윤석열 몰아내기로 비쳤다. 5년 단임이라는 짧은 임기에, 4년 차에 이르러 거둔 최대의 성과다. 검찰 개혁이 윤석열 몰아내기처럼 됐다. 수사기관을 민주당 손아귀에 집어넣으려는 의도로 비쳤다. 그 바람에 검찰 개혁과 공수처에 대한 여론만 나빠졌다.

공감 능력 결핍이 문제다

역대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률

역대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률

왜 레임덕이 오는 걸까. 지지율 하락, 정책 실패, 인사 실패, 선거 패배, 친인척과 측근 비리 등을 꼽는다. 이러한 원인을 관통하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공감 능력’이다. 현실과 다른 환상 세계에 빠져 이런 원인을 만들고, 추락하는 지지율을 보면서도 손을 못 쓴다.

돈키호테가 이상해진 것은 기사도 소설 탓이다. 현실을 기사도 소설 속 세상과 혼동했다. 책은 지혜를 키워주지만, 책 몇 권 읽은 것으로 세상을 다 안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겐 대책이 없다. 단순할수록 용감하다. 반대자에는 용서가 없다. 중국의 홍위병,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모두 어린아이들을 전위대로 세웠다. 그러기에 단순논리로 적과 우리 편을 단칼에 나누고,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을 저질렀다.

권력자가 한 가지 논리에 빠지면 정말 위험하다. 돈키호테 같은 환상이라면 더 큰 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도 현실과 유리된 탓에 나왔다. 현실과 멀어지면 민심이 이반한다. “부동산 시장은 상당히 안정되는 것 같다” “전 월세는 안정돼 있지 않으냐”는 말이 그렇다. “일자리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인다” “기적 같은 선방”이라며 국민의 부아를 돋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도 문 대통령은 세계가 ‘K-방역’을 배워 가려 한다고 자랑했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말했다. 하필 자랑만 하면 대유행이 반복됐다. 백신을 구하기도 전에 북한에 나눠주겠다는 말부터 했다. 방역 환경과 자체 개발 능력에 대한 환상이 현실을 무시한 탓이다. 외교 환경에 대한 차이도 심각하다. 그런데 이제 와 대통령과 백신 TF가 서로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기가 막힌다.

제왕적 대통령제 손질할 때

문 대통령은 추미애-윤석열 갈등을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징계 안을 올려도 “대통령은 재가만 할 수 있다”며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런 대통령이 윤 총장 징계에 대한 법원 심리가 있던 22일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등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권력기관 개혁 문제에…힘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강제징용 재판과 관련한 청와대-대법원 소통을 ‘사법 농단’이라고 단죄한 대통령과 대법원장 아닌가. 더구나 이번엔 대통령이 사실상 소송당사자인데.

말과 행동이 따로 가는 게 많다. 오리 다리를 보는 느낌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한다고 했지만, 양측 모두 한국 정부가 거짓말한다고 불만이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 연동형 선거법을 패스트트랙까지 태웠다. 그러더니 위성정당을 만들어 거대 정당이 독식하는 구도로 군소정당의 간까지 빼먹었다. 야당에 비토권을 줘 공수처가 중립적이라고 큰소리치더니 돌아서자마자 이 조항을 지워버렸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더니 ‘아빠 찬스’ ‘엄마 찬스’에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에 막말한 사람을 중용했다. ‘춘풍추상’(春風秋霜)도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해달라’거나 ‘나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도 섬기겠다’는 말도 힘을 잃어버렸다.

돈키호테는 만신창이로 돌아가면서도 자신을 최고의 무훈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부상은 부상이 아니고, 망신은 망신이 아니다. 나 홀로 다른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귀를 열어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잡을 수가 없다.

가뜩이나 코로나19가 온 나라를 짓누르고 있다. 벌써 내년 4월 7일 보궐선거 바람이 분다. 선거 결과는 국면을 크게 흔들 수 있다. 그때쯤 내후년 3월 9일 치러질 차기 권력 경쟁에 들어간다. 현 정부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조차 촉박하다.

87년 체제는 민주 항쟁의 성과다. 이 계기로 우리 민주주의가 크게 도약했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레임덕에 시달리지 않은 대통령이 있었는가. 정당이 역할을 못 하고, 권력자에 종속됐다. 사람마다 새 정당을 만들었다.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은 대부분 당에서 쫓겨났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결과다. 이제 이것을 고칠 때도 됐다.

역대 대통령 모두 레임덕 함정에 빠져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국정 수행 평가)이 40% 아래로 떨어졌다. 한국갤럽과 리얼미터가 모두 12월 들어 그런 결과를 내놨다. 얼마나 떨어지면 레임덕인가. 한국갤럽 자료를 보면 4년 차가 되기 전에 30% 이하로 떨어진 대통령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면 문 대통령 지지도는 아직 견고한 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년 차 1분기에 29%로 출발했다. 2년 차 2분기(28%) 이후 30%를 넘은 일이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년 차 2분기(28%), 김대중 전 대통령은 3년 차 4분기(30%), 노무현 전 대통령은 1년 차 3분기(29%), 이명박 전 대통령은 1년 차 2분기(21%)에 30% 아래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4년 차 3분기까지 30% 이상을 유지하다 탄핵이 추진된 4분기(12%)에 급전직하했다.

측근 비리가 방아쇠 역할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보게이트와 차남 현철씨의 구속 이후 레임덕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승현·이용호·최규선 등 권력형 게이트가 잇달아 터지고, 아들 삼 형제(홍삼 트리오)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힘이 빠졌다. 대개 임기 1년여를 남겨놓은 시점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님 비리가 터진 것도 이때다.

권력 내분도 큰 원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호남세력(난닝구)과 개혁세력(빽바지)의 갈등으로 고생했다. 2년 차에 탄핵에 시달리고, 임기 후반 야당에 대연정을 제의할 정도로 흔들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친박근혜 세력과의 갈등이 임기 내내 고민거리였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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