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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당근과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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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애란
한애란 기자 중앙일보 앤츠랩 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지난 주말, 집 정리를 위해 쓰던 물건 몇 가지를 ‘당근했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을 통해 팔았다는 뜻이다. 아이가 즐겨 봤던 A전집은 ‘사용감 많다’는 설명에도 글 올린 지 2분 만에 9명이 ‘사겠다’고 달려들었다. 인기 전집인 건 알았지만 다소 낡은 듯해서 당근마켓 기존 거래가보다 30% 낮춰 값을 부른 영향이었다. 반면 B전집은 ‘새 책 수준’이란 홍보문구에도 입질이 시원찮았다. 사실 B전집이 새 책 수준인 건 아이의 흥미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중고 시세보다 1만원 올려 불렀으니 한편으론 당연한 결과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그 물건에 딱 맞는 가격을 신기할 정도로 찾아냈다. 마치 물건에 대한 판매자의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몇 번 안 쓴 착즙기는 고민 없이 시세대로 내놨다. 사용법이 복잡해서 손이 안 가는 물건이었다. 썩 인기 끌진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웬걸. 바로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가격 네고 좀 해달라’는 요청에 인심 써서 5000원을 깎아주고,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한참 기다렸다 물건을 전달했다. 훈훈하게 거래를 마무리했다 싶었는데, 30분 만에 구매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설명서 봐도 복잡해서 못 쓰겠어요. 재당근할게요.”

재당근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것을 다시 파는 것을 뜻한다. 한 번도 안 써보고 팔겠다니, 처음부터 재당근을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 허무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시장의 속성인 것을. 시장은 거래 동기까지 따져 묻지 않는 법이다. 거래 동기가 위법이 아닌 한에야 그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다. 그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돌아갈 뿐이다. 구매자가 얼마의 가격에 재당근을 하든 말든, 제값 받고 팔았으면 판매자는 그걸로 충분하다. 구매자는 재당근이 뜻대로 안 되면 재고를 떠안거나 값을 깎아 손해를 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정상 작동하는 시장에선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 공급자와 수요자만 있을 뿐이다.

중고 착즙기 거래에서 통하는 이런 시장의 논리가 부동산 세계라고 다를까. 거래의 동기(실소유냐 투자냐)와 거래 경력(1주택이냐 다주택이냐), 자금의 원천(현금이냐 빚이냐)을 따지면 과연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정책 당국자들에게 당근해보기를 권한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