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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백신 실패 경위 철저히 밝히고 책임 물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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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영국·미국·캐나다 등 선진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그제 싱가포르에 화이자 백신 1차분이 도착했다는 외신을 접한 우리 국민의 심정은 부러움을 넘어 착잡하다. 조만간 일본도 백신을 접종한다니 ‘강 건너 남의 집 잔치’를 구경만 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백신 중요하다는 전문가 건의 흘려들어 #국산 치료제 맹신하다 구매 기회 놓쳐 #김상조 정책실장이 백신TF 잘 챙겼어야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5부 요인 초청 간담회에서 뚜렷한 근거 제시 없이 "우리도 특별히 늦지 않게 접종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고,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백신 때문에 걱정들이 많은데 백신 개발국이 먼저 접종하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일”이라고 강조했는데,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황당하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정부가 왜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했는지 한심한 내막과 실상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세균 총리는 그제 방송에 출연해 “정부가 백신TF를 가동한 지난 7월 확진자 수가 100명 수준이어서 백신 의존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총리의 이 발언은 전문가들이 백신 확보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 이 정부가 얼마나 안이하게 상황을 인식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6월 말 처음 가동된 백신TF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도했으나 그후 김 실장이 빠지면서 정책 추진력이 떨어졌다. 이후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 실무자급으로 TF를 운영하다 보니 과감한 구매 의사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권준욱 국립보건원장이 맡던 백신TF를 백신 전문가가 아닌 방역 전문가인 나성웅 질병청 차장에게 넘겼다. 백신 계약 경험이 없어 아스트라제네카 외에 화이자와 모더나 등과는 개별 접촉 논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니 개탄스럽다. 기획재정부는 선심성 사업에 수십조원을 쓰면서 국민 생명을 지키는 예산 배정에는 유달리 인색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청와대와 정부 일각에서 “K방역으로 코로나 통제가 가능해 백신은 급하지 않고 1월이면 국산 치료제가 시판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면서 백신 확보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백신보다 치료제를 맹신해 오판하는 바람에 백신 확보에 차질을 초래한 셈이다. 그러다 10월에 백신 확보를 위해 베팅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뒤늦게 11월 말 G20 화상회의에서 “공평한 백신 배분”을 역설했지만 이미 주요 선진국들이 백신을 선점한 뒤였다.

이종구 전 질병관리본부장은 그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월과 6월 청와대 회의에 참석해 문 대통령에게 두 차례나 백신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그때 청와대 참모가 전문가의 충고를 제지하지 않고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백신 성적표가 이렇게 초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는 오늘 0시부터, 나머지 지방은 내일 0시부터 1월 3일까지 5인 이상 집합(모임)이 금지된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코로나 확산의 고삐를 다잡기 위해서다. 정부의 판단 착오로 자영업자를 비롯해 수많은 국민이 더 오래 고통받게 돼 매우 안타깝다. 그래도 ‘코로나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국민의 참여가 불가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