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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인데 돌이 아닌…해변에 나타난 ‘뉴락(NEW ROCK)’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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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돌을 찾아보세요.”
자세히 살펴보니 작지만 동그란 모양의 스티로폼 결절이 보인다. 포장재로 쓰는 그 흰색 스티로폼이다. 마치 기암괴석처럼 변한 스티로폼은 일명 ‘스티로폼 락’이다.

매트, 쿠션, 건축재료 등으로 사용되는 우레탄스펀지는 주로 옅은 갈색 계열로 발견된다. 작품명 '스펀지락'. 2020. 한국.

매트, 쿠션, 건축재료 등으로 사용되는 우레탄스펀지는 주로 옅은 갈색 계열로 발견된다. 작품명 '스펀지락'. 2020. 한국.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카페 ‘보틀라운지’에서 지난달 7일부터 장한나 작가(32)의 ‘뉴락’ 전시가 열리고 있다.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공부한 장한나 작가는 우리나라 해변에서 채집한 다양한 인공물들을 작품으로 전시한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자연물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돌처럼 변한 인공물, 즉 뉴락(NEW ROCK‧새로운 돌)이다. 해변으로 떠내려온 비닐·스펀지·플라스틱·스티로폼이 파도와 바람을 맞아 닳고, 햇빛에 녹아 기암괴석처럼 변한 것들이다. 장 작가는 전시를 통해 자연과 절대 섞일 수 없었던 플라스틱이 지질학의 일부가 되고 생태의 일부가 된다는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때론 그 안에 따개비나 조개 등 생명이 기거하며 작은 생태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오브제처럼 아름다운 작품에는 ‘수석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장한나 작가가 16일 ‘뉴락’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연희동 '보틀라운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장한나 작가가 16일 ‘뉴락’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연희동 '보틀라운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뉴락’의 시작은 작업차 방문했던 경북 울진의 한 해변에서 이상하게 생긴 돌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그 한적한 바닷가에서 장 작가는 “바다의 민낯을 봤다”고 했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 관리되지 않는 바닷가에는 생수병·세제통·빨대·포장재 등 온갖 쓰레기가 몰려와 있었다. 그 중에서 돌인데 돌이 아닌 것을 처음 발견했다. 이후 제주도 한 검은 모래 해변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스티로폼 돌을 발견했다.
“사람이 없는 해변의 쓰레기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고, 이를 쉽고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뉴락’을 모으기 시작했다. 추한 쓰레기를 그대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쓰레기를 전시해 사람들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다.”

푸른색 비닐이 바람과 햇빛에 마모되어 변형된 모습. 우상조 기자

푸른색 비닐이 바람과 햇빛에 마모되어 변형된 모습. 우상조 기자

처음부터 돌로 변한 플라스틱으로 무슨 작업을 할지 떠올랐던 건 아니다. 해변에서 주워와 자세히 관찰하다보니 ‘수석’이 떠올랐다고 한다. 수석을 모으는 문화는 자연의 삼라만상이 담긴 돌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자 하는 행위다. 장 작가는 “이 아름다운 플라스틱에도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이 절묘하게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마치 수석을 전시하듯 플라스틱 조각들을 전시한 이유다.

2018년 제주에서 발견한 '뉴모픽 락.' 우상조 기자

2018년 제주에서 발견한 '뉴모픽 락.' 우상조 기자

약 4년간 제주‧인천‧양양‧강릉‧울진‧대부도 등 해변 이곳저곳을 돌았다. 처음에는 구분 작업부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스티로폼과 스펀지, 그 외의 것으로 종류를 나눠 나란히 늘어놓는 방식이다. 스티로폼 락, 스펀지 락, 뉴모픽 락 세 종류다. '뉴모픽 락'은 작가가 만든 단어다. 변성암(metamorphic rock)에서 앞부분 ‘메타’를 빼고 ‘뉴’를 붙였다. 변형이 너무 심해서 원래의 모습이나 용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다.

2019년 제주도에서 발견한 '뉴락.' 낚시줄이 녹아 '뉴모픽 락'이 됐다. 우상조 기자

2019년 제주도에서 발견한 '뉴락.' 낚시줄이 녹아 '뉴모픽 락'이 됐다. 우상조 기자

해변에 가면 몇 시간이고 땅을 쳐다보며 보물을 골라내듯 플라스틱을 골라낸다고 한다. 요구르트 통이 햇볕에 녹아 물고기 모양으로 녹은 것, 낚싯줄이나 수세미가 변형돼 작은 돌처럼 보이는 것, 플라스틱 블록이 녹아 예쁜 파란색 돌이 된 것 등. 한 번 바닷가에 나가면 양손 무겁게 ‘뉴락’을 들고 왔다. 가방에 담아 오는 것도 모자라 택배로 부칠 정도로 많았다. 현무암 반출이 안 되는 제주 공항에서 숱하게 저지도 당했다. 진짜 돌이 아닌 플라스틱은 통과지만, 간혹 현무암에 플라스틱이 붙어 생성된 ‘뉴락’은 사진을 찍어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경북 울진의 한 바닷가에서 '뉴락'을 채집중인 장한나 작가의 모습. 사진 장한나

경북 울진의 한 바닷가에서 '뉴락'을 채집중인 장한나 작가의 모습. 사진 장한나

장한나 작가가 수집한 ‘뉴락’에는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사진으로 남긴 작업에서 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카메라 렌즈로 세제 통 손잡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안에 작은 생물들이 집을 지은 것 같은 흔적이 징그러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포용력 같기도 하다. 플라스틱마저 품어버리는 생명력에 처절함과 경외를 느낀다.”

검정색 플라스틱 통 손잡이에서 발견된 생명의 흔적. 생물이 자연에 버려진 플라스틱에 적응에 생태계를 만드는 '플라스틱 스피어' 현상이다. 사진 장한나

검정색 플라스틱 통 손잡이에서 발견된 생명의 흔적. 생물이 자연에 버려진 플라스틱에 적응에 생태계를 만드는 '플라스틱 스피어' 현상이다. 사진 장한나

장 작가는 “플라스틱에 인간이 열광한 이유는 쉽게 망가지지 않고 썩지 않는 안정성 때문”이라며 “그게 역으로 결국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인간의 수명과 비교도 안 되게 긴 수명을 갖게 된 플라스틱은 바닷속에서도 튼튼한 몸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더라도 결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이렇게 자연을 담아버리는 존재가 됐다.

必환경 라이프(37) #플라스틱 쓰레기로 전시 연 장한나 작가

전시장에는 '뉴락'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돋보기가 구비돼 있다. 우상조 기자

전시장에는 '뉴락'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돋보기가 구비돼 있다. 우상조 기자

어떻게 보면 플라스틱도 지구에서 왔다. 지구 밑바닥의 물질을 시추해 석유의 일부로 만들어진 게 플라스틱이다. 장 작가는 “지금 우리가 쓰는 플라스틱이 지구 표면에 쭉 얇게 쌓이고 있는 게 아닐까”라며 “다른 물질들처럼 썩지도 않을 테니 오랜 시간이 지나면 화석처럼 지층의 한 부분, 지질학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상상한다”고 했다. 실제로 네덜란드의 한 자연사 박물관 내 ‘지구의 구성 요소’ 섹션에는 호상철광층, 변성역암 등의 암석에 이어 다양한 플라스틱이 뭉쳐진 덩어리가 전시돼 있다고 한다.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편에서는 플라스틱 화석을 다루기도 한다. 플라스틱은 이제 인류를 표현하는 돌이 됐다.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암석’이다.

수억 번의 파도질에 의해 둥글게 마모된 형상. 작품명 '스티로폼 락' 2020. 한국.

수억 번의 파도질에 의해 둥글게 마모된 형상. 작품명 '스티로폼 락' 2020. 한국.

“작업으로 친환경 또는 쓰레기 문제를 훈계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뉴락’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신기하고 아름다운데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그래서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장한나 작가가 이번 ‘뉴락’ 전시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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