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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으로 올겨울 넘길 것” 백신과 거리두기한 정부의 오판

중앙일보

입력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뉴시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뉴시스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정부가 17일 예정에 없던 백신 도입 관련 브리핑을 18일 오전 하겠다고 기자단에게 공지했을 때 화이자·얀센·모더나 백신 도입 시기나 단계별 물량 등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화이자·얀센 백신은 이달 내에, 모더나는 내년 1월 계약 체결을 목표로 협의 중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이달 8일 ‘4400만명 도입 계획’을 발표한 이후 간간이 내놨던 것과 차이 없었다. 18일 브리핑에선 한국이 ‘백신 후진국’을 모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줬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다 한국은 '백신 후진국' 됐나

국내 개발에 방점…8월 본격 선구매 협상 나서 

정부는 4월 17일 치료제·백신 개발 범정부 실무추진단 회의를 열었다. 미국이 5월 중순 ‘초고속 작전팀’을 출범시킨 것에 비하면 4월 실무추진단 구성이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백신의 필요성을 일찍 인지한 듯 하지만 국내 백신 개발이 관심이었다. 게다가 5,6월 ‘K방역’ 홍보에 바빴다. 세계와 공유하고, 중남미까지 수출하고, 생활방역을 알린다고 홍보했다. 관련 정부 부처가 나서 세계 표준 길잡이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개발중인 코로나 백신 후보 물질. 로이터=뉴스1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개발중인 코로나 백신 후보 물질. 로이터=뉴스1

그러다 정부는 8월 다국적 제약사와 선구매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은 7, 8월에, 유럽연합은 8월에 계약했는데 그제서야 출발했다. 9월 15일 인구 60%, 약 3000만명의 백신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겠다고 발표했고 지난달 27일 아스트라제네카와 첫 계약을 했다. 하지만 믿었던 아스트라제네카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심사의 벽에 막혀 내년 3월 이전에 승인이 날지 의문인 상황이다.

임인택 보건복지부 보건산업정책국장은 18일 브리핑에서 “최대한 국민의 건강을 담보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가장 안전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백신을 도입하자는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과정에서 협상했다”고 설명했다. 임 국장은 “심각한 부작용으로 사망사고까지 있던 상황에서 백신을 사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부분이 굉장한 논쟁거리였다”라고도 말했다. 안전성을 따지다 보니 이런 상황이 생겼다는 것이다.

“거리두기 과신해 소극 대응” 비판도

하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다. 대형병원의 한 감염내과 교수는 “백신 역사를 보면 모든 백신에는 부작용이 있다. 소아마비 백신도 부작용보다 신체가 마비되지 않고 목숨을 건진 애들이 더 많아서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팬더믹(대유행 감염병)이라도 2년 지나면 수그러든다. 첫해 겨울이 가장 피해가 크다. 올해 겨울이 그 때다. 지금 백신이 가장 필요하며 백신으로 많은 인구를 보호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미국 등이 부작용 같은 걸 몰라서 서둘렀느냐. 부작용과 백신의 효과 크기를 저울질해서 선구매를 선택한 것이다. 다른 나라 맞는 것을 두고보자는데, 올 겨울 피해는 어떡할 거냐. 여기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더나가의 코로나19 백신. AFP=연합뉴스

모더나가의 코로나19 백신. AFP=연합뉴스

김남중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도 “화이자·모더나 백신이 언제 들어오는지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 안전성 검증 후 쓴다고 하지만 핑계 같다. 백신은 틀림없이 부작용이 있다. 화이자·모더나 접종자의 50%에서 맞은 자리가 붓는 국소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일상생활 못할 정도의 부작용은 1%도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부작용을 감안해도 이득이 더 큰 집단이 있다. 65세 이상 노인과 기저질환(지병)이 있는 사람이 그렇다”고 말했다.

거리두기 효과를 과신한 면도 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창원파티마 소아과 교수)은 “5월에 백신에 관한 태스크 포스(TF)를 만들어서 운영했다. 그런데 이 당시만 하더라도 환자의 발생이 많지 않아 소극적으로 대응한 측면이 있고 예산에서도 제외됐다”라고 말했다. 선구매 협상에 뛰어든 8월만 해도 거리 두기를 올려 치솟던 확진자를 막았다. 그런 방법으로 겨울을 넘길 수 있다고 쉽게 판단했다.

“소신있게 추진할 분위기 안 돼”

사후 책임을 두려워한 관료들의 보신주의가 가장 큰 이유다. 백신 도입에 관여한 한 전문가는 “가격과 임상 성공 여부 등 여러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차근차근 (협상을 진행)한 것 같다”면서도 “우리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따져온 것이다. 미국은 리스크를 짊어지고 모더나에 1조2000억원의 연구개발(R&D) 자금을 주고 3억 도즈를 선구매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그렇게 했으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감옥 가야 하지 않았겠느냐. 그럴 만큼 돈이 있는 나라도 아니고 미국·영국처럼 하기 쉽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2010년 서울 이화여대 목동병원 외부에 설치된 신종플루 진료소에서 내원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서울 이화여대 목동병원 외부에 설치된 신종플루 진료소에서 내원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2009년 신종플루 때도 그랬다. 당시 신종플루 백신 2400만명 분을 구입해 700만명 분이 남았다. 접종 도중 발생이 확 줄면서 백신이 남았다. 이후 백신을 비롯한 감염병 대응 전반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당시 감사 결과에서 담당 과장이 별건으로 경고 처분을 받았다. 감사 과정에서 백신 수급에 관해 세게 감사를 받았다. 이종구 서울대 교수(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은 “감사원은 백신 때문에 징계한 건 없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이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는 뜻이다. 성백린 백신실용화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지난달 전문가 위원회에서 정부가 재량권을 갖고 (백신 종류를)선택하되 전국민 대상으로 접종할 분량을 확보하라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었다”며 “공무원들이 몸을 사리는 것 같다. 코로나에 감염된 공무원을 문책하겠다고 했는데, 이런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무원들이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하는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할 공무원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말 행정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백신을 과도하게 비축했을 때 그것을 몇 개월 이내에 폐기해야 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에 따르는 사후적인 책임 문제도 사실은 있다”고 말했다.

美·日은 정상들이 나서 

한 보건의료 분야 원로 교수는 “정치가가 나서 ‘책임은 내가 질테니 공무원이 나서라’고 했어야 하는데 대통령도 총리도 그러질 않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일본은 대통령과 총리가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코로나19 수도권 방역상황 긴급점검회의에서 “드디어 백신과 치료제로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 정부는 4400만 명분의 백신 물량을 확보했고, 내년 2~3월이면 초기 물량이 들어와 접종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며 처음으로 백신 도입과 관련해 언급했다.

미국서 첫 코로나19 백신 접종한 뉴욕 병원의 간호사 샌드라 린지. AP=연합뉴스

미국서 첫 코로나19 백신 접종한 뉴욕 병원의 간호사 샌드라 린지. AP=연합뉴스

최재욱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백신이 유일한 게임체인저(판도를 뒤집어놓는 요소)”라며 “하루라도 빨리 맞춰 집단면역을 형성하고 코로나를 종식시켜야 모든 것이 정상화된다”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지난 3~4월부터 미국·영국 등 많은 나라가 선구매 방식으로 백신 전쟁을 벌인 이유도 그때문이다. 여러 군데 다 걸쳐서 확보는 공격적으로, 대신 접종은 신중하게 했어야 했는데 정책이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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