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4만원 들여 종 만든다고? 줄줄 새는 日 '코로나 교부금’

중앙일보

입력 2020.12.18 05:00

일본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상징물을 청사 내에 설치하려다 뜻을 접었다. 코로나19 피해 복구에 쓰라고 편성한 교부금이 실제 급한 곳에는 가지 않고 엉뚱하게 새고 있다는 여론의 반발에 부딪히면서다.

'확진자 차별 반대' 명목 청사에 만들려다 제동
스키장 조명, 초등학생 가방 구입에 예산 배정도

다른 지자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일본 사회에서 논란이 한창이다.

사가현이 기증해 구마모토현 국립 한센병 요양소에 설치돼있는 종. 사가현은 이 종을 본 따 ‘맹세의 종’을 현청에 세우려고 했다. [아사히신문 캡처]

사가현이 기증해 구마모토현 국립 한센병 요양소에 설치돼있는 종. 사가현은 이 종을 본 따 ‘맹세의 종’을 현청에 세우려고 했다. [아사히신문 캡처]

17일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날(16일) 사가(佐賀)현 의회는 만장일치로 ‘맹세의 종’ 설치 사업에 배정된 780만엔(약 8264만원)의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해당 사업은 지난달 사가현이 정부로부터 교부금을 받은 뒤 편성됐다. 이 매체는 사가현이 현재까지 모두 151억엔(약 1600억원)의 교부금을 받았다고 전했다.

사가현은 과거 구마모토(熊本)현 국립 한센병 요양소에 기증한 종의 복제품을 현청에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야마구치 요시노리(山口祥義) 사가현 지사는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차별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어 아이들과 '차별 없는 현'을 만든다는 소망을 공유하고 싶다”고 '맹세의 종'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후폭풍이 일었다.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며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에서 태평한 예산 놀음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면서다.

사가현 음식업 조합 관계자는 마이니치신문에 “손님이 줄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지원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며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했던) 지난 9월에도 대책이 없었던 만큼 이번 '맹세의 종' 사건에 더 화가 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야마구치 지사의 '보여주기식 행정'도 비판 여론에 불을 붙였다. SNS에 종 설치 반대 글을 올린 주민의 얘기를 듣겠다고 했지만, 장시간 대화에도 지사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 주민은 “사가현 주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여전히 없다”며 “내가 무엇 때문에 지사를 만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야마구치 지사가 의회의 예산안 삭감 후 ‘종이 이만큼 유명해졌으니 차별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며 “주민들과의 인식 차이에 대해선 끝까지 해명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정부 교부금으로 조명 교체가 계획된 니가타현 현립 역사박물관 내부 모습. [아사히신문 캡처]

정부 교부금으로 조명 교체가 계획된 니가타현 현립 역사박물관 내부 모습. [아사히신문 캡처]

코로나19 교부금이 전혀 엉뚱한 곳에 쓰인 다른 사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사가현은 해당 재원으로 사가 공항 내 ‘우주를 테마로 한 다목적 전시 공간’을 설치하겠다며 2400만엔(약 2억5465만원)을 배정했다.

홋카이도(北海道)에선 스키장 조명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데 180만엔(약 1909만원), 초등학생 통학용 가방을 사는 데 210만엔(약 2228만원)이 사용돼 논란을 빚고 있다. 니가타(新潟)현도 현립 역사박물관 조명을 교체·정비하는 데 4500만엔(약 4억7748만)을 편성했다.

히라오카 가즈히사(平岡和久) 릿츠메이칸(立命館)대 재정학 교수는 마이니치신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검사 체제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교부금이 이런 곳에 투입되면 주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렵다”며 “정부가 교부금 용도에 대해 확실한 지침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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