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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부산역에서 보는 서울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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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다. 서울 가는 열차 창 너머에서 경상도 아가씨가 슬피 우는 중이란다. 그런데 이 노래의 탄생배경은 뭘까. 모범답안은 한국전쟁과 피난살이겠다. 그러나 입장이 다른 답도 있을 것이다. 서태지 이후 세대라면 노래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맥락 없는 토목엔지니어라면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것이다. 경부선 준공.

대륙과 대양이 만나는 지점 부산역 #분단으로 정착역으로 바뀐 서울역 #경의선과 연결되어야 하는 경부선 #부산역을 규정하는 경의선 지하화

조선 시대의 지도에서 부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19세기가 다 끝날 때까지 부산은 동래성 옆의 작은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바닷가 한촌이 대한민국 두 번째 규모의 도시가 되는 기폭제는 철도부설이었다. 그 철도가 지금 나그네를 싣고 떠나는 경부선이었고.

철도 시대 이전에 서양인들이 도착하는 곳은 부산이 아니고 제물포였다. 그들은 우마차에 실려 이어지는 구절양장 진창길에 넌더리를 냈다. 그리고 만난 종착점 도시의 조용한 기괴함에 놀라워했다. 그게 한양이었다. 새 아침이 밝았으니 새벽종을 울리고 새마을을 만들자고 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아침에도 고요했다. 그래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도성의 고요를 처음 흔들어 깨운 건 남대문 밖 기차역의 기적소리였다. 첫 철도를 놓기로 했을 때 그 노선이 경인선이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능란한 교섭능력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없으나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 1896년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892년부터 인천이 아닌 부산을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 계획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철도의 존재가 절박했던 것은 당연히 일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대륙 진출과 교두보 확보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동치던 대한제국의 역사 따라 철도부설의 주체들도 엎치락뒤치락했다. 신의주를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를 처음 구상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철도는 대한제국에게도 대륙으로 향하는 신작로였겠다. 그러나 1905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일본군부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즉시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그들의 야망은 한반도 너머에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경인·경부·경의선 모두 일본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공통점은 교행 시 좌측통행.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부산만큼 존재도 희미했던 대전이 핵심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도 철도 덕이다. 정확히 말하면 역의 설치다. 그런데 부산역과 대전역은 다 역이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영어 단어가 다르다. 부산역은 터미널(terminal)이고 대전역은 스테이션(station)이다. 굳이 구분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이다. 정거장은 종착역에 이르기 위해 잠시 서는 곳이다. 그래서 서울·대전·평양역이 다 정거장이다. 대륙으로 가기 위해 잠시 서는 곳.

서울역이 정체성 혼란에 빠진 것은 남북분단 때문이다. 신의주 가는 철도가 막히면서 서울역은 정거장이 아니고 종착역이 되었다. 경의선의 종착역은 문산역으로 바뀌었으니 경문선이라 불렸어야 마땅했다. 그 사이 고속철도가 개통하면서 서울역은 아예 대놓고 종착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을 호령하던 건물로서의 서울역은 엉뚱하게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서울역은 민자역사라는 제도 덕에 수모스럽게 백화점 부속시설로 몰락했다. 대한민국 수도 중앙역의 체면이 도대체 말이 아니다.

지금 서울역은 종착역과 정거장의 단점을 골고루 골라 담고 있다. 철도의 문제는 도시를 극단적으로 양분한다는 것이다. 철도역사의 전면은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되 후면은 도시의 그늘로 남는다. 그건 서울·대전·평양역이 모두 공통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서울로 7017〉로 바뀌었을 때 서울역 후면에서 벌어진 도시변화는 그 단절의 폭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철도가 국토를 바꿨다. 그런데 지난 세기 국토변화의 관점에서 철도부설보다 큰 사건은 분단이었다. 결국 서울역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분단 국토의 미래를 어떻게 보냐는데 달려있다. 그것은 경문선이 아닌 경의선의 가치와 가능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토 그림이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다면 경부선은 대륙과 대양을 잇는 동맥이겠다. 그 고리가 부산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바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고리는 서울역이다.

백 년 전에 깔린 경의선은 당시의 기술 한계에 의해 지형을 따라 구절양장 휘어있다. 우리가 연결해야 할 것은 거의 열 배의 속도로 내달리는 철도다. 경의선의 기존 구간을 버리고 지하로 연결한다면 경부선과 경의선은 이어질 수 있다. 서울역도 지하화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의 장점을 골라 담은 역이 되겠다. 서울역 주변이 다 바뀔 것이다.

부산역도 육지 끝의 종착역이 아니고 바다를 향한 길의 출발역이 될 수 있다. 대륙과 대양을 잇는 다른 의미의 정거장이 되겠다. 그건 국토 내 어떤 도시도 갖지 못한 가능성이다.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는 부산역이 종착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여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