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만에 벗은 '이춘재 누명'...판사도 검사도 고개 숙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17 17:08

업데이트 2020.12.17 17:25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웃어보이고 있다. 뉴스1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웃어보이고 있다. 뉴스1

"이 사건의 재심 판결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피고인의 명예 회복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17일 오후 이춘재 8차 연쇄살인 사건 재심 선고 공판이 열린 수원법원종합청사 501호 법정. 판사가 피고인석에 있는 윤성여(53)씨에게 사과를 한 뒤 무죄를 선고하자 법정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씨는자신의 재심 재판을 도운 변호인단과 함께 손뼉을 치고 얼싸안았다.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쓴지 32년 만의 무죄 선고다. 윤씨는 재판 후 취재진에게 "앞으로 저 같은 (억울한) 사람이 안 나오길 바란다. 모든 일에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20년 복역 후 32년만에 무죄 선고받은 윤성여씨

法, 윤성여 씨에 32년 만의 무죄 선고

윤씨는 1989년 7월 이춘재 8차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여중생 A양(당시 13세)이 성폭행당한 후 살해된 된 것이다. 윤씨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다. 그러나 지난해 이춘재(57)가 "8차 사건도 내가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윤씨는 같은 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 그는 8차 연쇄살인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인으로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었다. 뉴스1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 그는 8차 연쇄살인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인으로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었다. 뉴스1

재심을 담당한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이날 윤씨를 범인으로 몰았던 과거 수사 등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재판부는 "과거 피고인이 경찰에 자백한 내용은 불법 체포·감금 과정에서 폭행·가혹 행위로 얻어진 것이라 임의성이 없고 적법절차에 따라 작성된 것이 아니라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또 "담을 넘어 피해자의 집으로 침입했다는 과거 자백 내용도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피고인의 신체 상태 등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윤씨보단 증인으로 재심 법정에 섰던 이춘재의 자백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춘재의 자백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당시 범행현장이나 피해자 사체 상태 등 객관적인 증거들과도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다. 윤씨를 범행으로 몰았던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서 등도 "판단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오류와 모순점이 있어 그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법원도 "잘못된 판결 사과드린다" 

재판부는 선고 전 윤씨에게 "경찰에서의 가혹 행위와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제출된 증거의 오류를 법원이 재판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해 잘못된 판결이 선고됐다"며 "20년이라는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정신·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을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한다"고 밝혔다.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검사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검사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이 사건을 직접 수사한 수원지검 형사6부 소속 검사 2명도 이날 윤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지난달 19일 열린 결심 공판에 이어 재차 사과했다. 경찰청도 "이춘재 검거로 윤씨의 결백을 입증하긴 했지만 무고한 청년에게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어 옥살이를 겪게 하는 등 큰 상처를 드린 점 깊이 반성한다"며 "윤씨를 비롯해 피해자와 가족 등 관련된 모든 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과거 수사 관계자 상대로 손배소 청구"

윤씨의 재심을 담당한 박준영 변호사와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이주희 변호사는 즉각 환영 의사를 밝혔다. 박준영 변호사는 "윤씨가 (교도소에서) 살아 나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변호인단은 앞으로 국가는 물론 과거 윤씨의 수사와 재판에 관여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뜻도 밝혔다. 김칠준 변호사는 "윤씨의 무죄 선고와 법원이 억울한 옥살이를 살게 한 데 대해 사죄의 뜻을 밝힌 것을 환영한다"며 "과거 수사 과정에서 발생했던 불법 행위와 법원의 오판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형사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으로 구금됐던 사람이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국가에 청구하는 형사보상금은 무죄 선고가 나온 해의 최저 임금의 5배까지 가능하다. 윤씨는 19년 6개월간 복역을 한 만큼 대략 17억 6000만 원 정도의 형사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정신적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면 20억~40억원가량을 보상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윤씨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살면서 생각해 보겠다. 보상 문제도 잘 모르겠다"며 "30년 만에 무죄를 받아 속이 후련하고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밝게 웃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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