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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에 또 꺾인 日 ‘부부 별성’···믿었던 스가도 끝내 침묵

중앙일보

입력

부부가 각각 다른 성(姓)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른바 ‘선택적 부부 별성제’(夫婦別姓制)를 도입하려던 일본 정부의 시도가 집권 자민당 내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 혼인신고시 부부의 성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 “가족 단위의 사회제도에 혼란이 초래된다”는 주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 것이다.

부부 별성제 도입하려는 정부 계획안 사실상 ‘퇴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 9월 총재 경선이 끝난 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 9월 총재 경선이 끝난 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16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전날(15일) 열린 자민당 회의에서는 정부의 ‘제5차 남녀 공동참여 기본계획’ 원안 중 선택적 부부 별성제 관련 내용이 대폭 축소·삭제된 채 당 공식 안으로 승인됐다. 2021~2025년 5년간 정부가 추진할 양성평등 관련 정책과 제도의 방향성을 다루고 있는 이 계획은 국회 승인을 거친 뒤 이달 내 각의에서 의결될 예정이다.

이번 계획에서 이목이 쏠린 건 단연 부부 별성제 관련 대목이었다. 일본 정부는 원안에 "국회의 조속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강하게 기대하며 정부도 필요한 대응을 추진할 것”이라고 기술하는 등 부부 별성제에 대한 추진 의지를 표명했다. 부부 별성을 허용하는 데 국회 차원의 합의가 이뤄지면 정부도 민법 개정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미였지만, 자민당은 최종 회의에서 관련 문구를 수정해 사실상 제안을 거부했다.

부부 별성제 빼고 동성제 옹호 논리 넣은 자민당

구체적으로 자민당은 ‘결혼 전 성을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 제도의 본 모습’이라는 원안 문구를 ‘부부의 성에 관한 구체적 제도의 본 모습’으로 대체했다. 당 공식 안에서는 ‘선택적 부부 별성제’라는 용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사히신문은 애매한 단어 선택으로 부부 별성제 논의가 후퇴됐다고 평가했다.

관련 계획에 대해 ‘대응을 추진할 것’이라는 원안 문구도 ‘추가 검토를 추진할 것’으로 약화했다.

이밖에 ‘성이 끊길 것이라는 우려에 결혼을 하지 못해 저출산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거나 ‘국제사회에서 부부 동성을 법률로 의무화 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 외에 눈에 띄지 않는다’는 원안 문구가 삭제되기도 했다. 반면 ‘호적 제도와 일체가 된 부부동성 제도의 역사를 근거로 하는’이라는 문구는 이번 당의 안에 새로 추가됐다. 부부 별성제가 도입되면 “가족 단위의 사회제도가 붕괴될 수 있고, 자녀의 성씨 안정성도 손상된다”는 당내 보수파의 입김이 반영됐다는 의미다.

별성제 우군 기대받던 스가의 침묵

당초 일본에선 이번엔 선택적 부부 별성제 도입에 탄력이 붙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여성이 남편 쪽 성을 따라가는 경우가 96% 이상인 상황에서 부부 동성(同姓)제는 남녀 불평등을 조장하는 시대착오적 제도라는 비판이 늘면서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환경상이 지난 9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환경상이 지난 9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정치권 반응도 우호적이었다.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일본 환경상, 고노 다로(河野太郎) 행정개혁상과 같은 개혁적 이미지의 정치인들은 이미 부부 별성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와 달리 의원 시절 별성제 허용 쪽에 섰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의 이력도 긍정적 신호로 읽혔다. 그러나 스가 총리는 모리 마사코(森雅子) 자민당 여성활약추진특별위원장 등 당내 별성제 찬성파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당내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파의 입김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 침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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