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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테스형이 답하다 “모두 자기만 옳은 줄 착각해서 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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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2020년 세밑에 묻다 “세상이 왜 이래”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고 있는 소크라테스(가운데)를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철인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고 있는 소크라테스(가운데)를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철인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수 나훈아는 올해 일흔셋이다. 소크라테스(기원전 700?~기원전 399)는 일흔에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뒀다. 단순 계산하면 나훈아가 더 오래 살았다. 2020년의 나훈아가 2400년 전 ‘테스형’을 불러냈다. “세상이 왜 이래” “세월은 또 왜 저래” 아파하며 고대 철학자를 ‘동네형’처럼 끌어내렸다. 코로나19 재앙으로 ‘가황’의 연말 투어는 모두 취소됐지만 그가 지난 추석에 애타게 찾은 ‘테스형’은 2020년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키워드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니 세밑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코로나19 3차 대확산에 암흑 정국이 겹치면서 세상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테스형’에게 물어본다. “모르겠소 테스형, 왜 이렇게 힘든가요.” 전문가들의 대답을 들었다.

2400년 전 아테네와 오늘의 우리 #민주주의 좌초, 역병 확산 닮은꼴 #“나는 모른다”에 담긴 놀라운 지혜 #지도층보다 시민들이 더 현명해

#1. 너 자신을 알라

나훈아는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이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지 않았다. 철학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이 유명한 말은 델포이 신전에 쓰여 있는 경구다. 소크라테스는 대신 이곳에서 독특한 신탁을 받았다. 예언녀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소크라테스는 당황했다. “무슨 뜻일까. 신께서 거짓말을 할 리 없는데” 말이다. 그는 지혜롭다는 이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소문난 정치가·시인·장인(匠人)에게 묻고 또 캐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왜 지혜로운지를…. 실마리는 간단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세상을 아는 체하는 명망가들의 실체를 뚫어봤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자신이 진실로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겸양·겸손을 뛰어넘는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동양적 지혜와도 결이 다르다. ‘무지의 지’를 설파한 그리스 철인처럼 내가 틀릴 수도, 타인이 옳을 수도를 인정하는 적극적 태도다. 경청과 토론, 대화와 공존의 자세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진영 논리, 줄 세우기. 편 가르기의 대척점에 서 있다.

서양고전문헌학자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요즘 우리 사회는 자석의 N극·S극처럼 힘센 세력들이 지지층을 빨아들이며 비판적 중간층이 사라진 형태”이라며 “소크라테스가 평생 추구한 ‘무지의 지’는 그리스 사회의 선동가는 물론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포퓰리즘, 반지성주의에 대한 매서운 꾸짖음”이라고 말했다.

철학저술가 양윤덕씨는 소크라테스는 공동체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다고 요약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적과의 공존이다.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고 하면 토론의 판이 차려지지 않는다. 여야 진영을 넘어선 문제다. 상대를 적으로만 여기면 법 또한 그때그때 달라진다. 법이 언제든 비열한 무기로 변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이익과 권력만 좇았던 소피스트의 궤변을 경계했다. 요즘 SNS에 넘치는 숱한 선동과 억지도 소피스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했다.

#2. 내일이 두렵다

올 한가위 특별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는 가수 나훈아. ‘테스형!’의 유튜브 공식 뮤직비디오 조회수만 1240만회를 넘어섰다. [TV 캡처]

올 한가위 특별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는 가수 나훈아. ‘테스형!’의 유튜브 공식 뮤직비디오 조회수만 1240만회를 넘어섰다. [TV 캡처]

나훈아는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또 내일이 두렵다’고 했다.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한문학과)는 “2020년 최대의 화제는 단연 나훈아”라며 “아픔-세상-사랑-세월로 이어지는 시적 재능이 반짝인다. ‘아! 공자형’ ‘아! 퇴계형’ 했으면 얼마나 어색했을까”라고 반문했다. 나훈아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지키는 데 목숨마저 내놓았다. 최초의 철학적 순교자로 꼽힌다. 아테네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부정한다는 터무니 없는 혐의로 법정에 섰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진리에 대한 탐색을 놓지 않았다. 돈을 내고 사면을 받거나, 외국으로 탈출하라는 주변의 권고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가 탐구해온 철학을 배신하는, 즉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과 힘이 있는 한 철학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졌다.

아테네인은 소크라테스를 ‘괴질’에 비유했다. 젊은이를 망쳐놓는 바이러스처럼 여겼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았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코로나19 시대의 소크라테스를 주목했다. “코로나19는 인간의 무지를 반성하게 한다. 그간 쌓아온 과학과 지식의 민낯이 드러났다. 바이러스 하나 못 잡는 게 우리의 현재다. 어떤 권력도, 재산도 소용없다. 문명인과 미개인의 구별도 의미 없다. 하물며 현실 정치는 어떤가. 무지한 자의 신념만큼 큰 죄악도 없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역병이 기승을 부렸다. 영국 학자 베터니 휴즈의 『아테네의 변명』에 따르면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만 명이 쓰러졌다.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의 공격을 받은 아테네가 성문을 걸어 잠그면서 감염 속도가 가팔라졌다. 『아테네 팬데믹』을 낸 안재원 교수는 “기원전 431년의 역병은 아테네 전통사회를 해체하고 새 사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선동가가 군림하던 아테네 민주정에 내재된 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천국은 있던가요

스산한 연말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역설이 힘을 얻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극심하다. 나훈아도 저 세상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천국은 있던가요”라고 물었다. 한데 소크라테스는 천국을 믿지 않았다. 예수의 천국, 부처의 피안을 설파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영혼과 덕을 닦고,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평생 선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군함과 성벽, 번쩍이는 조각상이 무슨 소용인가” “죽지 않으려고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된다” “철학은 죽음에 대한 연습이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성찰』을 쓴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는 소크라테스를 삶의 무기로 삼자고 권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즉 어떠한 권위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율적인 삶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지도층·지식층보다 일반 시민을 더 신뢰한 모양이다. “개에 걸고 맹세하건대, 가장 명망 높은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결함이 많고, 그들만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리가 더 밝은 것 같다”고 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확인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다시 꺼낸다. “아테네 시민이여, 돈을 벌고 명성과 위신을 높이는 일에 매달리면서 진리와 지혜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어령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육체를 감옥으로 생각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재테크에 몰두하고 이념만 고집하는 세태가 안타깝다”고 답했다. 베터니 휴즈는 “소크라테스는 현재 우리의 삶을 예견했다. 풍요로움이 물질주의로 이어지고, 민주주의가 전쟁의 깃발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페미니스트 선구자인가

남편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로 요강 안에 든 오물을 쏟아붓는 아내 크산티페. [사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남편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로 요강 안에 든 오물을 쏟아붓는 아내 크산티페. [사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잘것없었다. 도시의 주요  업무를 결정하는 시민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악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도 존재감이 없었다. 영국 역사학자 베터니 휴즈는 “(소크라테스 언행을 기록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이루는 10만 단어 가운데 크산티페는 딱 두 번 언급됐다”고 했다.

하지만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돈과 집안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야 했다. 속이 터져 말다툼도 자주 했을 수 있다. 그가 남편의 머리 위에 오물을 쏟아붓는 그림이 전해질 정도다.

여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여성을 말, 혹은 노예로 표현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인간이란 기준에서 남과 여의 능력 차이는 인정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여자는 절대 남자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하고, 모든 일과 직업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대 통념을 뒤집는 발언이다. 베터니 휴즈는 “소크라테스가 성 혁명을 주장한 원조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성 역할에 대한) 전통과 관습 그 너머를 보도록 자극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