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중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처신함.’ 한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등장하는 ‘중립’(中立)의 정의다. 쉬운 단어인데도 굳이 사전을 들춰본 건 이 단어가 제 용도에 쓰이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용례가 늘고 있어서다.

“공수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중립이 생명” “공수처가 철저한 정치적 중립 속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야를 넘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 등의 15일 대통령 발언을 보면서 무엄하게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당은 꼭 1년 전 논란 속에 검찰 수사여탈권이 담긴 공수처법을 통과시키면서 ‘친정권 수사기관’ 탄생 우려에 대한 방패막이로 처장 선출 방식을 내세웠다. 추천 정족수가 추천위원 7인(야당 몫 2인) 중 6인이라 야당 반대 인사는 공수처장이 될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게 걸림돌이 되자 불과 1년 만에 별다른 해명이나 사과도 없이 정족수를 ‘추천위원의 3분의 2’로 뜯어고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여당 인사가 공수처장이 돼도 막을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여기에 만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 ‘정치적 중립’과 ‘여야 협력’을 강조한 대통령에게서 ‘영혼’과 ‘상식’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대통령의 중립이 사전 속 중립과 다른 의미일 수 있겠다는 의구심은 그 농도가 옅지 않았다. 대통령은 법무·검찰 갈등 국면에서 외견상 철저한 중립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수시로 검찰총장의 뒤통수에 잽을 날렸다. 대통령의 아바타인지, 대통령이 아바타인지 헷갈릴 정도로 맹활약 중인 법무부 장관도 특이한 중립관(觀)을 선보였다. 검찰총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정치 입문 여부에 대해 말꼬리를 흐린 걸 두고 “정치적 중립 위배”라며 징계 청구를 하면서다. 당시 답변에 대해서는 기자도 아쉬움이 크지만, 그걸 징계 대상으로 삼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고 보긴 어렵다. 결국 상식은 중요치 않았다.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면 중립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빨갱이, 그리고 빨갱이들의 적. 여기 중립이 설 자리는 없어. 선택만 있을 뿐이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등장하는 이 대사가 대통령과 그의 아바타들이 중립의 외피 속에 숨겨놓은 진짜 속마음이 아닐까. 빨갱이라는 왜곡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그들이 말이다. 역설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