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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1만명 구한 美선장...시진핑 '정의의 전쟁'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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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북한군의 새벽 불시 침공으로 시작한 전쟁은 부산교두보 전투(8월 4일~9월 18일), 인천 상륙작전(9월 10~20일)을 거쳐 북진과 평양 점령(10월 18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반도에 몰래 들어온 중공군의 기습으로 유엔군은 치열한 전투를 겪어야 했다.

6·25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70년 #12월 15일은 흥남철수 시작한 그날 #혹한의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 이어 #10만 병력, 9만 피란민 무사히 철수 #유엔군 처절하게 싸워 한국 자유수호 #미·중, 상대 의지·능력 과소평가 교훈 #명예훈장 수훈자 5명 투혼에서 확인 #군인정신 발휘, 동료 지키고 임무완수 #시주석, “참전해 정의 지켜” 황당주장 #대한민국 정체성 지키려면 기억해야 #거제도 흥남철수 기념공원 사업도 #자유 지킨 젊은 유엔군을 기억할 때

지난 10월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27일 열린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행사'의 추모비행을 위한 사전 연습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지난 10월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27일 열린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행사'의 추모비행을 위한 사전 연습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그중에서도 6·25전쟁의 대격전으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11월 27일~12월 13일)와 수많은 북한 주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12월 15~24일)은 군인들의 투혼과 유엔군의 인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일대 사건으로 꼽힌다. 오늘은 흥남철수가 시작된 지 70년을 맞는 날이다.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대를 괴롭힌 건 중공군뿐 만이 아니었다. 영하 30~40도의 강추위가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사진= 미 해병대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대를 괴롭힌 건 중공군뿐 만이 아니었다. 영하 30~40도의 강추위가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사진= 미 해병대

장진호 전투, 미 해병대 가장 혹독한 싸움

장진호(長津湖) 전투는 미 해병대와 육군, 국군 카투사 대원, 영국 해병대로 이뤄진 3만 병력의 유엔군이 혹한의 개마고원에서 12만의 중공군에 포위돼 싸우면서 병력과 부대 편성을 온건히 보존한 채 선박 편으로 철수한 전투다. 전투가 벌어졌던 함경남도의 호수 이름을 따서 부른다. 미군은 당시 사용하던 일본군 지도에 나온 장진을 일본 발음인 초신으로 전달받아 이를 ‘초신 호수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로 부른다. 미 해병대가 겪었던 가장 혹독한 전투로 꼽힌다. ‘소수(Few)’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미 해병대 중에서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는 ‘초신 퓨(Chosin Few)’라는 이름의 모임을 계속해왔다. 대부분 90이 넘은 고령이다. 이 전투에 참전한 미국 해병대뿐 아니라 육군, 그리고 국군 카투사와 영국 해병대도 함께 기리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사진=미 해병대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사진=미 해병대

서로 상대 몰랐던 미국·중국, 혹독한 시련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1029명이 전사하고 유엔군 4894명이 실종됐으며 4582명이 부상했다. 여기에 7338명의 비전투 손실을 포함해 모두 1만7843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피의 전투다. 기습해온 중공군의 피해는 더욱 컸다. 자체 추산으로 1만9202명이 전사하고 2만8954명의 비전투 손실을 합쳐 4만8154명의 병력을 잃었다. 일부 연구자는 중공군이 6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 2019년 9월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4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식'에서 장진호 전투 참전했다 부상은 입은 헨리 셰이퍼 씨를 비롯한 참석용사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9년 9월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4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식'에서 장진호 전투 참전했다 부상은 입은 헨리 셰이퍼 씨를 비롯한 참석용사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당시 이 전투로 중공군은 미군을 장진호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면서 전략적 승리를, 미군은 중공군 병력을 대대적으로 섬멸하면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 당시 미군은 중공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으며, 중공군은 혹한기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기습을 가하면 미군이 쉽게 무너질  것으로 오산했다. 미군은 중공군을 오합지졸의 농민군대로, 중공군은 미군을 화력과 장비에만 의존해 투지가 떨어지는 ‘부잣집 도련님’ 군대로 각각 오해했다.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로 미군의 막강한 전력과 철저한 대비와 함께 처절한 투혼을 확인했다. 미군은 중공군의 은밀한 접근과 기습공격·야습 능력, 혹한 속에서 파상적인 공격을 펼칠 수 있는 의지를 목격했다.

1945년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일장기를 노획한 미국 해병들. 사잔=미 해병대

1945년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일장기를 노획한 미국 해병들. 사잔=미 해병대

태평양전쟁서 일제 격파 미 해병의 투혼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7일~45년 8월 15일) 당시 이오시마 등에서 일본군 물리친 미 해병대 처절한 투혼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미 해병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사이판 전투(1944년 6월 15~7월 9일), 괌 전투(7월 21일~9월 10일), 티니안 전투(7월 24일~8월 1일), 펠릴리우 전투(9월 15~11월 27일), 앙가우르 전투(9월 17일~10월 22일)를 치렀다. 1945년에는 이오시마 전투(2월 19일~3월 26일)와 오키나와 전투(3월 26~7월 2일)로 일본의 섬을 공격해 점령하고 본토 상륙을 앞두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 해병대는 많은 희생에도 절대 물러나지 않는 강인한 투지와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줬다.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9월 27일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 행사'를 위해 서울 용산구 전쟁지념관 상공을 날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그리고 국군 카투사와 영국 해병대와 함께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혹한 속에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한 작전이다. 김상선 기자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9월 27일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 행사'를 위해 서울 용산구 전쟁지념관 상공을 날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그리고 국군 카투사와 영국 해병대와 함께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혹한 속에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한 작전이다. 김상선 기자

당시 최악의 여건에도 탈출과 철수에 성공한 배경은 철저한 대비, 투혼, 그리고 인도주의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 해병대는 처절하게 싸워 중공군의 공세를 이겨내고 퇴로를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10만5000명의 병력과 9만 명의 피란민을 무사히 안전지대로 옮길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유엔군이 얼마나 투지를 발휘했는지는 이 전투에서 나온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의 공로증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5명은 명예훈장 수훈자를 냈다. 이들의 무공과 자취를 살펴본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치열한 투혼을 보여줘 미국 최고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훈한 미 해병대의 윌리엄 바버. 사진=미 해병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치열한 투혼을 보여줘 미국 최고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훈한 미 해병대의 윌리엄 바버. 사진=미 해병대

1개 미군 해병 중대, 중공군 1000명 사살  

수훈자인 윌리엄 바버(1919~2002년) 대위는 1940년 입대해 태평양전쟁 때는 이오시마 전투에 참전했으며 장진호 전투에선 해병 1사단 7연대 2대대 F 중대장이었다. 바버 대위는 혹한 속에 다리에 총알이 박혔음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닷새간 200명의 부하를 계속 지휘해 몰려오는 1400명의 중공군에 맞섰다. 그의 중대가 중공군 약 1000명을 사살하면서 방어선을 지킴으로써 8000명의 미 해병대는 질서 있게 철수할 수 있었다. F중대는 82명의 전사자를 냈다. 1970년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2002년 세상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워 미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은 헥터 캐퍼라타가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사진=미 백악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워 미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은 헥터 캐퍼라타가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사진=미 백악관

부상 전우 덮친 수류탄 던지다 부상

헥터 캐퍼라타(1926~2016년) 일병은 연대 병력의 중공군에 포위된 소대원들이 대부분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이 된 상황에서 5시간 동안 단독으로 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을 계속하며 진지와 동료를 지켰다. 이 과정에서 적 2개 소대 병력을 전멸시켰으며 적의 수류탄이 진지 안에 날아오자 이를 잽싸게 집어던져 아군 부상병의 목숨을 구했다. 수류탄이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오른손에 심한 상처를 입었으며, 적 저격수의 총알에 부상도 당했지만 포위망을 꿇고 지원 나온 다른 해병들에 의해 구출됐다. 1951년 전역하고 2016년 세상을 떠나 콴티코 국립묘지에 묻혔다.

명예훈장 수훈자인 돈 카를로스 페이스 중령. 사진=미국 육군

명예훈장 수훈자인 돈 카를로스 페이스 중령. 사진=미국 육군

2차대전 참전용사, 포위 중공군에 역습  

돈 카를로스 페이스(1918~50년) 중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육군 제82공수사단 소속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마켓가든 작전, 벌지 전투, 독일 침공 등 주요 전투를 겪었다. 6·25전쟁에서는 낙동강 전투에 이어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육군 제7사단 제31연대전투단(정규 연대에 기갑·포병·공병·방공 등 지원부대를 붙여 독자 전투가 가능하도록 편셩한 부대)의 제1대대장으로서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 닷새를 버티며 과감하게 싸웠다. 연대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를 맡았다. 중공군이 몰려오면서 방어선이 일부 무너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앞장서서 소수 병력을 이끌고 오히려 역습을 가해 적을 몰아냈다. 이를 통해 하마터면 큰 화를 당할 뻔했던 부대원의 목숨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수류탄 파편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다 적의 총격을 받고 전사했다. 혼란 중에 그의 유해는 수습되지 못했으며 그는 실종자로 기록됐다. 31연대 전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치른 부대로 기록됐다. 1960년대 전쟁 역사가들은 이 부대를 페이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태스크포스 페이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명예훈장을 받은 돈 카를로스 페이스 중령은 유해를 찾지 못해 62년간 실종자로 분류됐지만 2012년 북한에서 발굴한 유해가 그의 것으로 밝혀져 2013년 4월 육군장을 거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진=JPAC(미군 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 탐사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명예훈장을 받은 돈 카를로스 페이스 중령은 유해를 찾지 못해 62년간 실종자로 분류됐지만 2012년 북한에서 발굴한 유해가 그의 것으로 밝혀져 2013년 4월 육군장을 거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진=JPAC(미군 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 탐사팀)

실종자 분류됐다 62년 뒤 유해 찾아 장례

육군 준장인 페이스 중령의 부친은 1963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무덤 옆에 아들을 기리는 작은 묘비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유골은 62년이 지난 2012년 10월 미군 JPAC(미군 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 탐사팀)는 부하들의 증언과 DNA 감식을 거쳐 전투 현장에서 수습된 미군 유해가 그의 것임을 확인했다. JPAC는 ‘그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를 모토로 전 세계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숨진 미군의 유해를 찾아 가족들의 품에 돌려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유해는 2013년 4월 17일 최고의 예우로 육군장을 거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토마스 제롬 허드너 중위(오른쪽)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고 있다.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은 의회가 서훈을 결정하고 대통령에 수여한다. 사진=미 해군

토마스 제롬 허드너 중위(오른쪽)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고 있다.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은 의회가 서훈을 결정하고 대통령에 수여한다. 사진=미 해군

동료 구하러 전투기 눈밭에 불시착  

토마스 제롬 허드너(1924~2017년) 중위는 명문 필립스 고교(조지 HW 부시와 조지 W 부시 부자 대통령이 졸업)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군 조종사다.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군 항모 레이테 함에 배치돼 코르세어 전투기를 몰고 지상의 해병대 지원과 정찰 업무를 수행했다. 1950년 12월 4일 그는 함께 편대를 이뤄 비행하던 제시 브라운 소위가 중공군 포격에 격추되자 그를 돕기 위해 자신의 코르세어 전투기를 눈 덮인 산악지대에 동체 착륙시켰다. 이런 노력도 헛되이 브라운은 부상으로 곧 숨졌다. 브라운은 미 해군의 정규 비행교육을 거친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조종사다. 허드너는 동체 착륙 도중 자신도 부상을 입었으며 혹한 속에 버티다 간신히 구조됐다. 그는 1973년까지 해군에서 복무하며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2013년 7월 브라운의 유해를 찾겠다며 평양을 방문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3년 미 해군은 취역하는 녹스급 프리게이트함을 제시 L 브라운 함으로 명명했다. 전역을 앞뒀던 허드너는 취역식에 참석했다. 허드너는 2017년 세상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미 해군은 2018년 취역하는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에 토마스 J 허드너 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명예훈장 수훈자인 존 페이지 중령과 훈장. 사진=미 육군

명예훈장 수훈자인 존 페이지 중령과 훈장. 사진=미 육군

종횡무진 페이지 중령의 캠프 페이지  

존 페이지(1904~50년) 중령은 육군 장교다. 청년기에 웨스트포인트 진학을 희망했지만 약시로 거부되자 컬럼비아 대학에 들어가 학군단(ROTC) 장교로 임관했다. 포병 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10군단 포병장교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육군 중령으로 애초 사령부 근무였던 그는 보급로 확보를 위해 최전방에 나갔다가 그대로 남아 전투를 벌였다. 적의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 앞에서도 과감하게 육군과 해병대를 지휘해 보급로를 지켰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노출해 아군 항공기를 유도해 적을 정확하게 폭격하도록 했으며, 기관총 사격을 가해 몰려오는 적을 무력화하기도 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가 막바지에 이른 12월 11일 전사했다. 미 해군을 그를 기려 수송함을 존 페이지 함으로 명명했다. 미 육군은 춘천의 주한미군 아파치 헬기 기지에 캠프 페이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지는 2005년 문을 닫았다.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흥남 부두가 폭파되고 있다. 사진=미 해군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흥남 부두가 폭파되고 있다. 사진=미 해군

10만 군대와 9만 피란민의 흥남철수 이어져

이런 투혼과 희생 끝에 유엔군 주력은 흥남 항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원산 항이 적에게 점령돼 퇴로가 막히자 유엔군은 50년 12월 15일~24일 선박 편으로 남쪽으로 철수했다.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수많은 피란민이 함께 움직였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흥남 철수다.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군을 지휘하고 흥남철수작전을 주도한 에드워드 알몬드(1892.12.12~1979.6.11) 미국 육군 중장. 사진=연합뉴스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군을 지휘하고 흥남철수작전을 주도한 에드워드 알몬드(1892.12.12~1979.6.11) 미국 육군 중장. 사진=연합뉴스

‘크리스마스 카고’로 명명됐던 흥남철수 작전은 피난민 9만여 명을 수송하면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다. 미군은 철수선에서 장비와 물자를 버리고 피난민을 수송했다. 당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다.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연합뉴스]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당시 흥남에서 피란선을 탔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전 상가집에서 만난 자리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피란 당시 막배(마지막 배)를 탔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12월 23일 미군 통역을 맡았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의 부탁으로 레너드 라루 선장이 결단해 화물을 버리고 대신 1만4000명의 피란민을 싣고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탔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배는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의 피란민을 수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거제도 장승포 항으로 옮겨 크리스마스에 기항했다. 12월 15일 시작된 흥남철수의 실질적인 완료다.

재미동포 박동우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 사무총장이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미국에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 용사 3만6천492명 모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Korean War Memorial)를 건립하는 사업에 동참해 달라'고 글을 올렸다. 청원 기간은 이달 말까지다. 박 사무총장은 청원에서 미국 최초의 역사적인 기념비를 캘리포니아주 플러턴시에 건립하려고 기금 모금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플러턴시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개념도. 사진=연합뉴스

재미동포 박동우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 사무총장이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미국에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 용사 3만6천492명 모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Korean War Memorial)를 건립하는 사업에 동참해 달라'고 글을 올렸다. 청원 기간은 이달 말까지다. 박 사무총장은 청원에서 미국 최초의 역사적인 기념비를 캘리포니아주 플러턴시에 건립하려고 기금 모금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플러턴시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개념도. 사진=연합뉴스

시진핑 ‘정의의 전쟁’주장에 맞서야  

우리는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70주년을 맞아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겸 공산당 당서기가 지난 10월 23일 참전군인들과 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했던 연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6·25당시 한반도에 파병한 중국 군대의 이름. 한국에선 중공군으로 부름)의 70주년 참전기념일을 앞두고 한 연설이다.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 확장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중국 인민의 평화 생활을 수호하고 조선반도 국세를 안정시켰고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수호했다. 항미원조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장차 중화 민족의 역사책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인류 평화, 발전, 진보의 역사책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황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중 간에 현대사 인식차가 극심함을 확인할 수 있다. 6·25전쟁판 동북공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진 발언을 했는데도 한·중간에 아무런 마찰이 없다는 것은 외교사의 미스터리다.

장승포항은 1950년 흥남 철수 때 피란민을 태운 배가 닿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백종현 기자

장승포항은 1950년 흥남 철수 때 피란민을 태운 배가 닿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백종현 기자

기억과 추모로 끊임없이 반추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억과 추모, 그리고 교육일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기항했던 장승포항에는 현재 기념공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당시 이 배에서 태어나 김치 1~5로 각각 불린 5명의 아이 중 한명인 ‘김치 5’ 이경필 선생(수의사)은 “당시 피란선이 도착했던 장승포항에 흥남철수 기념공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며 “국가적·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에서 거제도로 철수한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1 손양영(오른쪽)씨와 김치5 이경필씨. 사지=연합뉴스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에서 거제도로 철수한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1 손양영(오른쪽)씨와 김치5 이경필씨. 사지=연합뉴스

흥남철수를 기념하는 시설물 조성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와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킨 희생자와 참전 군인을 길이 추모하는 프로그램 마련도 필요하다. 미 해병대는 물론 이들과 더불어 끝까지 임무를 수행한 국군 카투사와 영국 해병대의 활약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이런 기억이 모여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야만 역사를 기억할 수 있으며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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