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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선조의 독립운동 정신 계승, 한의학 세계화로 승화시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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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한의사 신준식·신민식 형제 

 자생한방병원은 한의학 발전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곳이다. 한의학의 의학적 가치를 현대 기준에 맞춰 입증하는 ‘과학화’를 일찌감치 추진했고, 명의와 비방 중심이던 한의학에 ‘표준화’의 개념을 이식했다. 자생의 특화된 침술인 동작침법이 미국·호주 등에서 의료진 보수교육 인증을 받음으로써 ‘세계화’의 문턱도 넘었다. 성과를 이룰 때마다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은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한의학을 한다”고 했다. 실제 신준식 명예이사장과 동생 신민식 자생의료재단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장)은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신홍균(작은할아버지)·신현표(아버지) 선생의 후손이다. 이들 형제는 지난 3여 년간의 독립운동 행적 고증 작업 끝에 지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국가보훈처로부터 신홍균 선생에 대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는 결실을 맺었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세상에 알려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한다는 거시적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신준식 명예이사장과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을 만나 그동안의 과정, 그리고 한의학의 계승·발전과 독립운동의 접점에 대해 들었다.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찾아나선 계기는.
신준식 명예이사장(이하 신준식) 자생한방병원의 설립 이념은 ‘긍휼지심(矜恤之心)’이다. ‘환자의 아픔을 내 가족의 아픔처럼 느껴 열과 성을 다해 진료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다. 가문 어르신들이 늘 강조하셨다. 이전부터 선친과 집안의 어르신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이 평소 참석하던 역사 공부 모임에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정상규 작가를 만났다. 정 작가에게 집안의 독립운동 활동을 이야기했더니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역사의 일부분인 만큼 제대로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입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이하 신민식) 시작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았다. 선친이 작성한 유서인 ‘월남유서’에서 출발했다. 월남유서엔 선친의 독립운동 활동이 상세히 기재돼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본명을 숨기고 가명도 여러 차례 바꾼다. 아버지는 신현표라는 이름 대신 ‘신호’라는 가명을, 작은할아버지는 신홍균 대신 ‘신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사실을 알게 됐다. 전국을 다니고 중국·일본 등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 현지인의 증언을 모았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강시 탐방에선 대전자령전투 현장과 주민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또 중국 공산당 기관지를 살피며 독립운동 행적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 방위성·외무성, 일본국립공문서관을 방문해 헌병일지, 경무대 기록, 당시 논문도 광범위하게 살폈다. 정 작가의 도움도 컸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국민대 이계형 교수도 만났다. 이계형 교수와 신홍균 선생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자료 등을 함께 보고 행적을 맞춰 나갔다. 또 백강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인 심정섭 선생을 만나 대전자령전투에서 신홍균 선생의 활약상에 대한 증언을 확보했다. 조경한 선생이 중앙일보 1975년 4월 16·26·29일자 지면에 기고한 글(‘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코너-상해임시정부 제45화)은 신굴, 신흘, 신홍균 선생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였다.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전투에서 신홍균 선생의 당시 활약상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독립군 지청천부대는 일본군 소탕을 위해 매복하다 폭우로 일본군의 일정이 연기되면서 극심한 군량 부족에 처했다. 이때 신홍균 선생은 한의 군의관으로서 기지를 발휘해 주위의 버섯을 채취해 소금에 절여 굶주린 독립군에 제공해 사기를 높였다.
대전자령전투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준식 한의사로서 약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이다. 이 버섯을 먹고 버틴 독립군들은 역사적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버섯은 독립군의 허기를 달래고 영양을 보충해 사기를 높이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오른쪽)과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이 부친인 신현표 선생의 흉상 앞에서 ‘월남유서’ 초본을 펼쳐 보이고 있다. 김동하 객원기자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오른쪽)과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이 부친인 신현표 선생의 흉상 앞에서 ‘월남유서’ 초본을 펼쳐 보이고 있다. 김동하 객원기자

대전자령전투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던데.
신민식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현장을 탐방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탄피를 발견했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보니 실제로 대전자령전투에서 사용한 탄피로 추정됐다. 작은 탄피 하나이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폭우 속에서도 버티고 버텨 끝내 큰 승리를 이뤄낸 독립군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의사가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신준식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자행했다. 일제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했으며 민족 정체성마저 빼앗으려 했다. 그중 하나가 ‘한의학 말살 정책’이다. 일제는 전통에 대한 가치를 폄하해 식민정치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서구 의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한편 한의학의 제도적인 지위를 박탈했다. 일제가 한의학을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폄하하며 한의학을 핍박한 것이 대표적이다. 서양의학 시술자를 의사, 한의사를 의생(醫生)이라고 규정하는 등 한의사의 지위를 격하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과 관련한 수많은 기록 속에서 한의사라는 단어를 찾기 어려운 이유다. 이러한 이유로 한의사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앞으로 더 많은 한의사 독립운동가가 세상에 알려지길 기대하고 있다.
가문의 독립운동사를 찾아나서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신민식 발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눈에 들어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이 많았다. 이들을 찾아뵙고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생의료재단은 약 3억원의 재단 기금을 투입해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의원과 독립유공자 및 후손 100명의 척추·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 지원을 펼치기도 했다. 또 독립유공자 후손의 학업과 생계를 돕는 장학금을 형님이 사비로 조성해 1억원을 이들에게 전달하는 등 많은 노력을 펼쳤다.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은 2017년부터 1년에 한 번은 현충원을 찾아 묘역을 정화하는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직원들과 함께 참배하고 정성스럽게 비석을 닦는다. 또 독립유공자의 유족과 후손을 위한 의료 지원, 장학사업 등을 펼치기도 했다. 최근에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역사의 핵심 인물인 최재형 선생의 외증손녀 박엘레나양을 치료하기 위해 ‘나눔 의료’를 실시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신준식 우선 한방 치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 한방 치료는 아직도 발전 가능성이 크다. 선친께서는 ‘인대침법’이라는 침술로 관절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 지금의 동작침법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안면신경마비(구안와사)에 활용하는 추나요법(SJS 무저항요법)을 개발해 임상에서 활용하고 있다. 내년에는 미국 평생의학교육인증원(ACCME)의 보수교육 정식 인증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미국 의사에게 한국의 한방의료기관이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는 의미다. 한의학은 현대에 맞게 재정립함으로써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돼야 한의학이 국민에게 더 신뢰받고 사랑받지 않겠나. ‘긍휼지심’의 정신으로 민족병원으로서 환자 치료에 전념하고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곳에 언제든 달려갈 준비를 할 것이다. 
신민식 실제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예우하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을 위해 꾸준히 지원을 이어갈 것이다. 사회공헌위원장으로서 내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할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주위에 힘든 분이 더욱 많아졌다. 우리 재단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 독립운동과 관련된 논문이 많이 나오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한의대 재학생들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발표하면 장학금 지원도 생각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한 선배 한의사의 얼을 되살리는 일을 지속할 예정이다.

중국서 독립군으로, 교원으로 항일 투쟁

 신홍균·신현표 선생 독립운동 발자취

지난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신홍균 선생. [사진 자생의료재단]

지난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신홍균 선생. [사진 자생의료재단]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 형제의 집안은 7대째 한의사 가문이다. 이들의 작은할아버지 신홍균 선생과 아버지 신현표 선생은 한의사로서 환자 치료에 헌신하면서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군의관으로 참전해 공을 쌓기도 하고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신홍균 선생은 1881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가업인 한의업을 이어가다 1911년 30세의 나이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중국 봉천성 장백현으로 갔다. 1916년 원종교와 대진단을 만든 독립운동가 김중건을 만난 신홍균 선생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0년 김중건 선생을 도와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하기도 했다. 김중건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된 당시부터 1925년 그가 돌아올 때까지 대진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지속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다. 특히 1933년 대전자령전투에서 군의관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 내용은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의 회고록 ‘대전자대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신홍균 선생은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 등에 참전하기도 했다.

 신현표 선생은 1903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9세 때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일제의 만행 때문에 자행됐던 통한의 침략 역사를 보며 성장했다. 1925년 제일 정몽학교훈도(교원)로 1년간 재임했다. 당시 정몽학교는 독립군 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학교 교사는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그 후 고향인 북청군으로 돌아와 한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1930년 일제가 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한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1930년 4월 21일 체포돼 취조를 받았다. 역사학에서는 1~3차 간도공산당 사건을 독립운동 관련 집회의 성격으로 보고 있다. 이 내용은 중외일보 1930년 4월 26일자 지면에 실려 있다. 신현표 선생은 1930년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으로 호송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때 수감번호가 1679번이었다.

글=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 사진=김동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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