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묻힐 뻔한 냉장고 속 아기…"출생신고 부모 손에만 맡기지 말아야"

중앙일보

입력 2020.12.12 05:00

“아이 엄마가 쌍둥이가 있다고 얘기하지 않아 남자아이가 숨진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난달 27일 전남 여수의 한 가정집 냉장고에서 생후 2개월 된 아기의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아기는 2018년 말에 태어나 2달 만에 숨진 뒤 2년 동안이나 냉장고에 방치됐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이 어머니 A(43)씨는 4일 아동학대 치사 등 혐의로 검찰에 넘겨졌습니다.

죽은 아기가 2년간 냉장고에 유기돼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우리 사회를 더 놀라게 한 점은 아이의 존재가 자칫 영영 묻힐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찰, 주민센터,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지난달 10일 A씨가 아들(7)과 딸(2)을 방임하고 있다는 신고를 처음 접수한 뒤 A씨 집을 수차례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를 아동쉼터로 보냈을 뿐, A씨에게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웃 주민이 알려주기 전까지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냉장고에 갓난아이가 잠들어있단 사실을 어떻게 2년 넘게 아무도 몰랐던 걸까요?

지난달 25일 전남 여수시 공무원이 확인한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이 발생한 가정집 내부. 여수시

지난달 25일 전남 여수시 공무원이 확인한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이 발생한 가정집 내부. 여수시

부모 신고 없인 존재하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 엄마가 말하지 않아 몰랐다”는 게 경찰과 여수시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입니다. 우리나라 출생신고제도의 허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에 따르면 자녀가 태어나면 출생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부모(혼외자의 경우 모)가 출생지 관할 주민센터 등에 출생신고를 해야 합니다. 이 기간 내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5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문제는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 국가기관이 아이의 존재를 먼저 인지할 방법이 사실상 없습니다. 여수 냉장고 아기를 관계 당국이 몰랐던 것도 A씨가 큰아들만 출생신고하고 쌍둥이인 딸과 숨진 아기는 출생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웃의 신고가 없었다면 냉장고 속 아기는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출생통보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습니다. 출생통보제는 아동이 태어난 '의료기관'이 출생사실을 공공기관에 통보하고, 이후에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는 제도입니다. 부모 신고에만 의존하지 않아서 출생신고의 누락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미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OECD 국가들은 아동이 출생하면 병원 시스템에 의해 당국에 자동 통보하거나 출생에 관여한 의사·조산사가 5~7일 안에 담당 공무원에게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우현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 매니저는 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출생등록은 모든 아동권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정수경

고우현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 매니저는 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출생등록은 모든 아동권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정수경

국제구호개발 NGO(비정부기구) 세이브더칠드런은 이번 여수 사건과 관련, 2일 성명서를 내고 “유엔아동권리협약 제7조는 아동 출생 후 즉시 등록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며 “출생통보제 도입은 출생신고 누락 및 지연에 따른 아동 인권침해를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우현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 매니저는 “출생등록은 모든 아동권리의 출발점”이라며 “아이가 있다는 걸 파악해야 만3세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 필수 예방접종 실시 여부 확인 등 아동학대 예방 정책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법무부 산하 위원회도 도입 권고했지만…

출생통보제 도입은 사실 이번 여수 사건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동 관련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사안입니다. 올해 2월, 정부가 처음 실시한 ‘만 3세 아동 소재·안전 전수조사’를 통해 출생신고 되지 않은 아동의 사망 사례가 발견됐을 때도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한 아동 단체 21곳은 공동 성명서를 내 출생통보제 도입을 촉구했습니다.

학대로 인한 영아 사망 사례는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2019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아동학대로 사망에 이른 아동은 총 42명인데 이 중 0~1세 아동은 45.2%에 달했습니다. 이번 냉장고 아기처럼 출생신고 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동까지 고려하면, 드러나지 않은 신생아·영아의 사망은 더 많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5월 23일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5월 23일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정부도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정부는 지난해 5월 ‘포용국가 아동정책’과 올해 8월 ‘제2차 아동정책 기본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정부는 발표에서 "모든 아동을 공적으로 등록해 아동이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하겠다"며 출생통보제 도입 계획을 내세웠습니다.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가 5월 의결한 권고문에도 “출생통보제를 신속하게 도입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도가 바뀌지 않은 이유는 법 개정을 둘러싼 여러 유관 기관 간 협의가 난항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고우현 매니저는 “출생통보제 도입을 위해서는 의료계, 법무부, 보건복지부 등 사이에 협의가 필요한데, 각자 이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 협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의료계는 출생통보제가 국가가 의료기관에 행정 업무를 떠넘기는 제도라 보고 강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5월 정부가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한 후 대한산부인과의사회(직선제)는 성명서를 내고 “의료기관은 행정기관이 아니며 병·의원 의료인은 공무원이 아니다”라며 “의료기관이 새로운 행정업무를 대신하는 것은 공무원법에 반하며 위헌적 법률”이라고 반발했습니다.

미혼모는 오히려 반대하는 ‘보호출산제’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면 출산 사실을 숨기고 싶은 산모가 병원을 피해 혼자 아이를 낳고 유기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됩니다. 사실 이번 여수 사건에서도 친모 A씨는 쌍둥이를 자택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출생통보제가 존재했어도 공공기관에 아이들 출생이 통보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자 ‘보호(익명)출산제’를 출생통보제와 함께 도입한다는 게 정부 계획입니다. 보호출산제는 신상 노출을 원치 않는 산모가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출생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산모가 보호출산을 원할 경우, 일정한 상담을 요건으로 개인정보가 공적 서류에 노출되지 않는 대신, 국가 시설이 산모 대신 영아를 보호하다가 후견·입양 절차를 밟게 됩니다.

하지만 국내 미혼모 단체와 아동 인권단체는 출생통보제엔 동의하지만, 보호출산제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입니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등 한부모단체와 아동인권단체들은 지난달 2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호출산제를 지금 도입하는 것은 여성에게 극단적인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임신 초기 상담부터 지원까지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기 임신출산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미혼모협회 아임맘 등 미혼모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보호출산제 도입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미혼모협회 아임맘 등 미혼모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보호출산제 도입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즉 미혼모가 혼자서도 아이를 출산·양육할 수 있게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채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는 건 국가가 산모에게 양육을 포기하는 선택지만 주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겁니다.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은 신원을 숨기고 싶다기보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이들을 지원하는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다”며 “자택출산의 경우 출생신고 절차도 더 복잡하다”고 말했습니다. 오 대표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면 국가가 미혼모에게 ‘아이를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주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결국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영아 유기 사건을 줄이기 위해선 출생신고제도 개선을 통해 ‘보편적 출생등록’을 보장하고, 미혼모에 대한 지원체계 및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입니다. 고우현 매니저는 “보편적 출생등록이 전제된 다음 취약한 환경에 있는 산모를 지원할 방법을 논의하는 게 순서인데, 우리는 아직 출생등록도 부모에게만 맡겨둔 상태에서 보호출산제를 거론하고 있다”며 “과연 보호출산제가 미혼모들이 진정 원하는 정책일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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