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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먼 나라,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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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현빈의 팬이 되었다. 입국 후 거쳐야 하는 2주간의 격리 탓이다. ‘격리생활의 동반자’ 넷플릭스에 접속하니 일본에서 가장 많이 본 콘텐트라며 ‘사랑의 불시착’을 계속 추천한다. 일본 외무상도 전편을 봤다는데 취재하는 셈 치고, 시작했다가 “우리 내일 만날 것처럼 오늘을 살아보는 게 어떻갔소? 하루를 기쁘게 살아보는 게 어떻갔소?”에 눈물 콧물 쏟으며 마무리. 함께 일하는 후배에게 “‘사랑의 불시착’ 다 봤어”하니 답이 돌아왔다. “도쿄특파원 준비 완료.”

넷플릭스에선 이렇게 가까운 두 나라인데, 오는 데만 5개월이 넘게 걸렸다. 7월 부임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입국 금지가 이어지며 발이 묶였다. 감정적으로는 ‘먼 나라’ 일지언정 물리적으로는 가까웠던 일본은 ‘멀고도 먼 나라’가 되어있었다. 양지와 응달을 오고 가던 한·일관계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매듭처럼 꼬인 지 오래. 특파원 발령을 받고 축하 인사보다 “어떡하냐”를 더 많이 들었다.

올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은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넷플릭스 캡처]

올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은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넷플릭스 캡처]

돌아보면 지금의 나란 인간은 ‘괜찮았던 한·일관계’의 산물이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두려움 없이’ 일본 콘텐트를 마구 소비하기 시작했고, 관심 없던 나라에 흥미가 생겼다. 유학을 왔던 2010~11년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2012년 8월)으로 한·일관계가 얼어붙기 직전. ‘동방신기’와 ‘카라’가 만들어 낸 ‘2차 한류붐’으로 지하철을 타면 교복 입은 학생들이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어오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분위기는 달라졌고, 일본에 있는 친구들은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한국어 사이트를 읽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전해왔다.

격리 해제 후 일주일, 달라진 공기는 아직 피부로 와닿진 않는다. ‘왔니?’ 환영인사라도 하듯 진도 3짜리 지진이 찾아왔을 뿐이다. 며칠 후 만난 부동산 중개인이 “도쿄가 흔들린 건 오랜만인데, 놀랐죠?” 했다. “아, 저는 3·11 대지진 때도 일본에 있었거든요.” “그래요? 지진이 이 특파원을 따라다니나 보네.” 저기요, 처음 보는 제게 왜 그런 악담을? 생각했지만 일본어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아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사이 한·일관계에도 꿈틀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이 바뀌더니 정치인들이 은밀하게 오고 간다. 양국 대사도 곧 교체된다는 소식. ‘괜찮은 한·일관계’ 역시 나를 따라다니는 무엇은 아닐까, 아직은 근거가 희박한 희망을 가져보면서. 일단 ‘우리 현빈’을 믿어보기로 한다.

이영희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