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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칼집에 권력을 넣어둘 수 있는 역량이 권위 낳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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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권력(power)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뭔가를 해내기 위해 발휘하는 그 모든 것이다. 군사력·경제력·정신력·정치력·매력·지력·자제력·드립력…이 모든 것이 권력이다.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인간은 태어나고, 태어나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울고, 토하고, 기어 다니고, 잡아당기고, 방안을 어지럽히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중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서 자기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자 분투한다. 그리고 그 실현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권력이 동원된다. 즉, 욕망과 목표가 있으면 권력은 존재하게 되어 있다.

권력이란 뭔가 해내고자 발휘하는 모든 것 #권력은 섣불리 휘두르는 순간 빛을 잃기 시작하고 #날 것으로 과시하면 결국 권력은 훼손되게 마련 #갖고 있되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순간 권위 생겨

모든 권력을 싫어한다는 말은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말이며,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것은 삶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여러 일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은 종종 목표를 지향하고, 그 목표는 권력의 행사를 통해 달성된다.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세속을 초월하려고 드는 선사(禪師)도 해탈을 도모한다. 마음의 고요를 얻기 위해서도,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는 어떤 나직한 힘이 필요하다. 정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겠다면, 어딘가 조용히 숨어서 자신의 멸종 소식을 기다려라.

권력을 싫어하거나 좋아하기 이전에, 권력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이 세상이 현상대로 유지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하다. 현상의 변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하다. 사무실이 현상대로 유지되기를 원하면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야 하고, 청소기를 돌리려면 동력이 필요하다. 거실의 탁자 배치를 바꾸려면, 탁자를 들어 옮겨야 하고, 탁자를 들려면 힘이 필요하다.

혼탁한 정치판을 바꾸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하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철저한 개혁이라고 중얼거려본들 정치판은 변하지 않는다. 권력이 있어야 소망하는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애써 선거를 치러 리더를 선출하는 것도,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는 권력을 창출하는 작업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창출하지 않으면 많은 일을 도모할 수 없다. 방역도 해낼 수 없고, 백신도 만들 수 없고, 치안도 유지할 수 없다. 권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도대체 해낼 수 없는 것들을 해내기 위해 분산된 권력들을 그러모아 집중시킨다.

많은 이들이 권력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권력은 자주, 그것도 너무 자주, 혐오할 만하다. 그러나 권력이 세상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혐오하는 것은 삶 자체를 혐오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말한다. “난 권위도 싫고, 권력도 싫고, 권좌도 싫고, 권세도 싫고, 권력욕도 싫고, 권력자도 싫어. 나는 그 ‘권(權)’자 들어가는 것들은 다 싫어. 사람은 다 평등해. 서로를 사랑해야 해.” 이 얼마나 아름답고 달콤한 말인가. 달콤한 나머지 이빨이 썩을 것 같다. 아마 그는 권능도 싫고 권한도 싫고 권한대행도 싫을 것이다. 그뿐인가. 어쩌면 권익도 싫고, 권리도 싫고, 권리장전도 싫고, 권고도 싫고, 권고사직은 당연히 싫고, 권투도 싫고, 권투선수도 싫고, 권불십년(權不十年)도 싫고, 권선징악도 싫고, 권장 사항도 싫고, 권역외상센터도 싫을지 모른다.

권력이 싫다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권태로운 말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권력이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도 아니고, 지금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질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평소에 권력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사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오히려 현재 권력 없는 사람을 영원히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저토록 아름다운 말을 반복하다가는 지력이 권태기에 빠질 위험이 있다. 권력이 싫다는 말만 가지고는 현 권력자를 혐오하는 것인지,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권력 자체를 냉소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권력을 냉소할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권력이라는 엄청난 상대를 두고 차갑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떤 권력을 발휘한 결과다. 권력이 진짜 없는 사람은 권력에 대해 냉소하기도 어렵다. 권력이 없다는 것은 당장 어떤 것을 도모하기도 어려운 힘겨운 상태라는 말인데, 어떻게 권력을 냉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들은 최저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도 힘겹기 때문에, 권력을 냉소하기보다는 권력을 갈망하기 쉽다. 일정한 권력이 있으면서 권력에 대해 냉소를 퍼붓는 일은 자신을 애써 약자로 위치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보통 때 권력은 잠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권력이 행사된다고? 그렇다면 인간사 매 순간이 결정적이다. 삶에서 권력을 소거할 수 없다면, 결국 권력과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권력의 편재(遍在)를 인정하되, 권력과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 시대의 문인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납게 굴지 않았는데도 백성들이 잘 따랐으니 우아하지 않습니까. 얽어매지 않았는데도 백성들이 스스로 복종했으니 단정하지 않습니까. 자리를 맡았을 때는 직무에 충실하고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는 백성들을 생각했으니, 바탕과 겉멋이 잘 조화를 이루지 않습니까.”

조찬한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말한다. 거칠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에도 일정한 통치 효과가 있었음을 찬탄한다. 실로, 권력은 권력자가 섣불리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빛을 잃기 시작한다. 손에 권력이 있다고 해서 무례하게 굴면 조만간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을 날 것으로 과시하면 결국 훼손되기 마련인 것이 권력이다. 폭력조차도 폭력을 진짜 휘두르기 전에 가장 강하다. 소위 잠룡은 아슬아슬하게 잠수하고 있을 때 가장 매력적인 법이다. 권력을 권력의 칼집에 넣어둘 수 있는 역량이 권위를 낳는다. 권력자가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권위를 선물로 받는다. 권위는 권력의 가장 말랑말랑한 형태다. 권위는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순간 발생한다.

선생의 권위는 어떤가? 교학(敎學)의 관계는 형식상 완전히 평등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정한 권위가 요청된다. 누군가 살며시 다가와 “당신의 스승이 되고 싶어요”라고 수줍게 귓속말을 하면 경계해야 한다. 권력 혹은 권위가 개재될 사안이기 때문이다. 사제지간도 아닌데, 아무나 붙잡고 가르치는 말투를 시전하면 상대가 갑자기 토하곤 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운 좋게도 자신의 스승 장 그르니에와의 관계에서 권위가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체험을 한 것 같다. 장 그르니에의 『섬』의 서문에서 자신의 스승을 찬미하며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장기간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한다. … 인간의 역사는 다행히도 증오 못지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도 건설되는 것이다.” 아마 장 그르니에는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잘 행사한 사람이었고, 카뮈는 그 권위의 세례를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은 행운아였던 것 같다. 카뮈의 서술에서는 이제 탈 성역화할 영역이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고양감마저 감돈다.

그러나 모두가 장 그르니에나 카뮈인 것은 아니다. 강자는 대개 권력 행사에 서툴고, 약자는 권력에의 저항에 서툴다.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상대가 마음 깊이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 한껏 무례하게 군다고 해서 권위주의가 타파되는 것도 아니다. 원치 않는 권력에 저항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비슷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조직화할 수 있다면, 권력에 대한 저항도 쉬울 것이다. 그렇게 조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정 정도 권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조직화의 역량 자체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권력자의 힘을 과장하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권력자의 힘은 늘 한계가 있다. 자신이 가진 힘 이상으로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자가 원하는 바이며, 그렇게 정도 이상으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작동이다. 권력은 약자로 하여금 권력의 증강 현실을 체험하게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