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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동학개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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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애란
한애란 기자 중앙일보 앤츠랩 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파도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 장정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범선을 띄운다. 펼쳐지는 돛에 새겨진 이름은 ‘BUY KOREA’.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배 위로 ‘한국경제를 확신합니다’라는 문구가 오버랩된다.

1999년 현대증권이 내놓은 바이 코리아 펀드 TV광고였다. 코스피가 여전히 500대에 머물렀던 그해 3월, ‘제2 금 모으기 운동’을 연상케 하는 애국심 호소 광고는 강력했다. 넉 달 만에 시중 자금 10조원을 끌어모으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투자설명회를 다니며 호언장담했다. “곧 주가지수가 2000을 넘어서고 2005년엔 6000까지 오른다.” 투자자들은 열광했고 언론은 그를 ‘바이코리아교 교주’라 칭했다. 코스피는 그해 연말 1000선을 돌파했다. 이듬해 고꾸라졌고, 이후 만 5년 넘게 1000 고지를 밟지 못했지만.

바이 코리아 펀드 신화는 깨졌지만, 주식시장의 애국 프레임은 20여 년이 지나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외세(외국인투자자)와 관군(기관투자자)에 맞서 국내 증시를 지킨다는 ‘동학개미운동’이 그렇다.

지난 3월 코스피가 추락하던 시점에 이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불안했다. 동학농민운동(혁명)은 실패한 혁명 아니던가. 게다가 ‘개미’는 오래전부터 개인투자자를 얕잡아 칭하는 표현이었다. 애국자로 추켜세워주는 건지, 바위에 계란치기라고 조롱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동학개미’를 기사 제목에 써도 되느냐 마느냐, 듣는 ‘개미’ 입장에서 기분 나쁘냐 아니냐를 고민했다. 그래서 한때 차라리 ‘국민주권찾기운동’으로 개명하자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코스피가 2700을 넘어선 지금. 누가 뭐래도 동학개미의 성공은 분명해 보인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국무회의에서 동학개미운동을 처음 언급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외국인과 기관이 주식을 팔고 나갈 때, 개인투자자들이 동학개미운동에 나서면서 우리 증시를 지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대통령은 “증시 활성화와 개인투자자 보호를 위한 정부 노력도 보탬이 됐다”는 자평도 덧붙였다.

과연 주식투자는 애국의 길인가. 증권사 회장이야 펀드를 팔기 위해 애국 마케팅을 할 수 있지만, 대통령까지 그렇게 칭찬하니 듣는 ‘개미’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