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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5만 왜군과 싸운 1만 조선 민관군 합장한 ‘만인의총’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심묵의 남원 사랑 이야기(6)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호남이 없었더라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는 의미로 이순신 장군이 2차 한산도 대첩과 진주성 2차 전투를 겪은 시점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된 말이다. 임진왜란 극복과정에서 호남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모두 알다시피 일본 침략에 의한 임진·정유년의 7년 전쟁은 우리나라에 너무 막대한 피해를 준 전쟁이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의병이 당시 전쟁에 참여했지만, 특히 호남 의병은 전국 종횡무진 오르내리며 왜군과 맞서 싸우면서 이름 없이 목숨을 잃고, 사라졌다. 남원을 거점으로 창의했던 의병, 장군, 열사의 활동을 뒤돌아볼수록 나는 남원에서 태어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임진왜란의 명장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황진 장군만 봐도 그렇다. 그는 남원에서 출생한 무인 출신으로 일찍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와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동복현감으로 있으면서도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관찰사 이광(李洸)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며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안덕원 곰치 전투에서 적장을 사살하고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있는 대둔산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공적을 세웠다.

권율 장군의 막하에서도 왜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으며, 김천일·최경회 장군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적과 9일간을 싸우다 적의 총에 맞고 전사했다. 이 밖에도 양대박, 황박, 소제, 고득뢰, 조경남, 안영, 정여진 등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남원을 피로 물들인 정유재란(1597년)땐 또 어땠나. 임진왜란 때 패한 요인이 곡창지대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북상하겠다는 계획에 따라 5만6000여 병력을 남원으로 보내 남원성을 총공격한 바 있다.

이때 남원성에는 조선군 1000여 명과 명나라 군사 3000여 명이 지키고 있었고 성민과 피난민을 합쳐 겨우 1만여 명뿐이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원성을 지키던 민관군은 5만6000여 명의 왜군을 맞아 8월 13일부터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 16일 새벽에 함락되고 만다.

남원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지켜낸 4일은 후방의 의병이 규합하고 군대를 재정비하는데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이듬해인 1598년 11월 임진·정유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지만, 사실 이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치열한 혈전을 벌인 남원성의 성벽(좌), 정유재란이 끝나고 시신들을 합장하여 묻었던 만인의총 구지(우). [사진 양심묵]

치열한 혈전을 벌인 남원성의 성벽(좌), 정유재란이 끝나고 시신들을 합장하여 묻었던 만인의총 구지(우). [사진 양심묵]

우리는 남원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모아 한 곳에 합장한 만인의 의로운 무덤을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이후 광해군 4년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배향해 오다 1964년에 지금의 자리(남원시 향교동)에 만인의 총을 조성, 해마다 순국한 만인의사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만인의총’은 국가 전란의 의로운 호국정신의 위업을 인정받아 2016년 국가 관리로 승격됐다.

만인의총 전경(좌), 민관군의 1만여 명을 합장한 만인의총(우).

만인의총 전경(좌), 민관군의 1만여 명을 합장한 만인의총(우).

만인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좌), 충렬사 내부에 모셔진 위패(우). [사진 양심묵]

만인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좌), 충렬사 내부에 모셔진 위패(우). [사진 양심묵]

이후에도 임진‧정유재란의 교훈으로 남원정신은 격변의 역사 속에서 실핏줄처럼 이어져 왔는데,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에도 그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남원정신은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농민들의 무장봉기로 알려진 동학농민혁명에서도 발현됐다. 남원은 최제우 동학 교주가 남원 교룡산성 내에 있는 은적암에서 동학을 창도한 뒤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집필하면서 ‘동학’이라는 용어를 체계화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적 성지로 알려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전라북도 정읍을 시작으로 동학 농민군이 분연히 일어났고, 남원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김개남이 주도한 전라좌도의 대도소 설치와 더불어 대접주인 유태홍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군의 결집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곳이 바로 남원이다.

남원에서는 ‘3·1만세 운동’ 때 이석기 덕과면장 주도로 공무원으로는 전국 최초로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켜 호남지역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황진장군의 위패와 초상을 모신 정충사(좌), 김주열 열사의 묘소(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소재)(우).

황진장군의 위패와 초상을 모신 정충사(좌), 김주열 열사의 묘소(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소재)(우).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묘소(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소재)(좌), 남원 3·1 만세 운동의 발상지에서 기념식을 갖는 모습(남원시 덕과면 사율리)(우). [사진 양심묵]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묘소(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소재)(좌), 남원 3·1 만세 운동의 발상지에서 기념식을 갖는 모습(남원시 덕과면 사율리)(우). [사진 양심묵]

남원 금지면 출신 김주열 열사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처참하게 죽음으로 부활해 현대 민주주의의 최선봉에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민주혁명의 상징이자 현대 민주화를 발전시켰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 또한 1987년 8월 22일 노동항쟁에 나섰다가 평화적인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죽음으로 맞서면서 민주 노동열사가 됐다.

남원의 선조들은 국가위기 때마다, 민주혁명의 절체절명의 순간 때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선봉에 서며 분연히 일어섰다.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문화가 있었기에 남원이 오늘도 존재하며,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지속한다.

남원시체육회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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