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양성희의 시시각각

사랑에도 동의가 필요해

중앙일보

입력 2020.12.0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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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성폭행에서 ‘동의’가 또 한번 쟁점이 됐다. 성폭행 후 피해자가 ‘괜찮다’고 했어도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최근 나왔다. 2014년 육군 하사 A씨가 함께 술을 마시다 만취한 여고생 B양을 화장실에서 성폭행한 사건이다. B양은 A씨의 지인 C씨에게 성폭행당한 직후였다. 옷이 다 벗겨지고 구토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성폭행과 동의에 대한 판결 진일보
‘무엇이 동의인가’ 남녀 인식차 여전
성별 고정관념이 진정한 동의 막아

1, 2심은 B양이 성관계 후 A씨에게 “괜찮다”고 했다는 점 등을 들어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봤다. 대법원은 달랐다. 피해자의 ‘괜찮다’란 말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정상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형식적인 답변이지 성관계에 동의한 답변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면에선 진일보했지만 관련 기사에는 악플도 많았다. ‘괜찮다고 해놓고 여자가 맘 바뀌면 강간범이 되니 남자만 억울’ ‘성관계 전 동의서를 쓰든지, 동의 영상을 찍어 놔야’. 일부 남성들이 거센 불만을 토로했다.

여성계가 ‘예스 민즈 예스’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주장하면서 성관계의 ‘동의’는 핫이슈로 떠올랐다. 과연 어떤 동의가 진짜 동의냐는 남성들의 항변이 나온다. 여성의 ‘변심’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호소한다. 전남대의 성심리학 강의에 기초한 책 『사랑에도 동의가 필요해』를 펴낸 양동옥 교수도 “성적 동의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이 개인을 넘어 사회적 갈등으로 심화되고 있는데, 어디서도 성적 동의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애와 성에 대한 남녀 대학생들의 설문과 조사, 토론으로 이뤄지는 양 교수의 강의는 각종 성평등상을 받으며 인기가 높다. 책에 따르면 여전히 “여자의 싫어요란 무슨 뜻인지” 묻는 남학생들이 있다. “남자의 싫어요가 진짜 싫다는 뜻이듯, 여자도 마찬가지”라고 양 교수는 답해 준다. 애정 행위 중 동의를 구하는 걸 비낭만적이라고 여기거나, 키스나 애무를 허락하면 성관계도 허락하는 신호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성관계 제안을 받고 동의의 뜻으로 가만히 있는 여성, 거절의 뜻으로 가만히 있는 여성도 있었다. 한쪽은 여자가 너무 밝힌다고 할까 봐 가만히 있었고, 다른 한쪽은 거절하면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아무 반응을 안 보여 스스로 멈추기를 기대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또 남성들은 성폭력이 여성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건인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원치 않았으나 설득해서 성관계했을 경우 여성은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강도가 높은 반면, 남성들은 상대도 동의했다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 같은 “연인 관계의 성적 의사소통의 갈등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성별 고정관념과 ‘나’의 즐거움을 ‘우리’의 즐거움으로 포장하는 성별 불평등과 맞닿아 있다.” 양 교수의 결론이다. 성을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수평적 행위라기보다 ‘남성은 제안, 여성은 승낙·거절하며 남성이 주도하는 것’, 혹은 여성에게서 ‘빼앗는 것’ ‘대가를 주고 사거나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이 동의라는 성적 소통을 어렵게 한다는 설명이다. 성 문화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동의 여부를 따지는 수준이지만 1990년대 이후 서구에서는 어떤 동의인지도 묻는다. 폭행·협박은 없어도 일방의 성적 희생을 요구해 상호 동의로 보기 어려운 ‘원하지 않은 동의를 한 성관계(unwanted consensual sex)’의 위험성도 인정한다는 얘기다. 이건 개인의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성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양 교수를 한 번 더 인용한다. “네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상호 동의한 성관계. 또 하나는 원하지 않은 동의를 한 성관계를 사랑과 배려로 포장한 의자, 다른 하나는 원하지 않은 동의를 한 성관계를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의자. 나머지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폭력하는 의자다. 당신은 어느 의자에 앉고 싶은가?”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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