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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소녀상과 안네 프랑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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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지난 2일 일본 외무성이 발칵 뒤집혔다.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 의회가 ‘평화의 소녀상’의 영구 설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철거되는 줄 알았던 일본 정부로선 다 된 밥이 엎어진 모양새였다.

독일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회장 한정화)는 비밀리에 소녀상 설치를 추진했다. 일본 정부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9월 말 소녀상이 공개되자, 일본은 전방위적 ‘소녀상 철거 작전’에 들어갔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상은 독일 외교장관에게, 외무성 부대신을 지낸 사토 마사히사 자민당 의원은 미테구청과 구의회, 베를린 시장 등에게 편지를 보내 철거를 압박했다. 도쿄도 신주쿠구도 가세했다. “한·일 정치 문제를 끌어들이면 일·독 관계가 손상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소녀상 영구 설치를 결정한 미테구 의회의 결의문은 ‘고노 담화’를 인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고노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역사적 연구, 사실에 따라서 조직적·도덕적 책임을 인정했다”고 언급한 것이다.

위안부가 역사 왜곡이라고 공격해왔던 우익들은 격분하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사설을 통해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 전 정권이 왜 그토록 고노 담화 재검증에 열을 올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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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 범죄 단죄에 철저한 독일에서 일본의 전방위적 압력은 오히려 독이 됐다. 독일 언론 타쯔(TAZ)는 “아직까지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로 자책골을 넣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정화 회장은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선 독일에서조차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소녀상을 계기로 비로소 심각성을 알게됐다는 목소리가 많다. 늦었지만 독일군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겠다는 여성도 있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소녀상 유지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여러 나라의 출신들이 평화롭게 함께 생활해나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소녀상이 일본을 비난하고 있어, 불화가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독일 현지에선 적잖은 일본인들이 소녀상 설치를 도왔고 뜻을 함께 하고 있다. 한·일의 정치문제가 아니라 전시 성폭력에 관한 인류 보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관련 자료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 정원 한 켠에 안네 프랑크의 동상이 있다. 기념관 측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통해 평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베를린 소녀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