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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여수항 뚫고 요트 밀입국…총까지 쏴도 아무도 몰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9월 17일 오전 3시 10분쯤 전남 여수시 앞 바다에서 15t급 세일링 요트가 3만9000t급 화물선과 충돌했다. 요트 선장인 한국인 한모(46)씨는 해경에 구조됐다. 그러나 이후 한씨는 총기 밀반입, 밀입국을 한 데 이어 살인미수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사진 여수해양경찰서]

지난 9월 17일 오전 3시 10분쯤 전남 여수시 앞 바다에서 15t급 세일링 요트가 3만9000t급 화물선과 충돌했다. 요트 선장인 한국인 한모(46)씨는 해경에 구조됐다. 그러나 이후 한씨는 총기 밀반입, 밀입국을 한 데 이어 살인미수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사진 여수해양경찰서]

대한민국 남해안의 안보망이 어이없이 뚫렸다. 40대 남성이 요트를 타고 해외 여행을 마친 뒤 전남 여수항으로 밀입국했고, 총기까지 밀반입해, 세종시에 올라가 내연녀에게 발포했다. 더구나 이 40대 남성은 애초에 다른 범죄 혐의로 지명수배 상태였다. 대전지검은 최근 사업가 한모(46)씨를 출입국관리법 위반, 관세법 위반,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한 것으로 6일 밝혀졌다. 검찰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씨의 범행 과정을 재구성했다.

2월 해외서 요트 구입해 출발 

한씨는 올해 2월 한국에서 크로아티아로 요트를 사기 위해 날아갔다. 그는 15t급 세일링 요트를 구매해 고국을 향해 출항했다. 그 사이 국내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또 수사 당국은 한씨를 별도의 범죄 혐의로 지명수배(A급 수배)했다. 한씨가 출국한 사실을 확인한 수사당국은 출입국 당국에 “한씨가 입국하면 통보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한씨는 요트 항해를 즐겼다. 귀국길에 미국 괌에 들르기도 했다. 그는 출항 후 약 7개월 만인 9월 남해에 도착했다.

남해로 들어오다 화물선과 충돌 

그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한씨가 탄 요트는 9월 17일 새벽 전남 여수시 앞바다에서 4만t급 화물선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한씨 요트의 돛이 심하게 부서졌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사고 수습에 나선 여수해양경찰서는 한씨 요트를 가까운 이순신 마리나로 끌고 왔다. 당시 해경이 “성공적으로 사고를 수습했다”는 취지의 브리핑까지 해 한씨의 충돌 사고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해경에 구조된 뒤 코로나19 검사 음성

항로나 해로로 출입국하는 사람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반드시 ‘CIQ(세관·출입국사무소·검역)’를 거쳐야 한다. 요트 사고 후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씨는 검역 절차부터 밟아야 했다. 여수검역소의 코로나19 검사 결과 그는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한씨의 최종 목적지는 여수 이순신 마리나가 아니라 경남 통영시 한산 마리나라는 점 때문에 자가 격리 조치가 면제됐다. 이렇게 검역 절차가 마무리됐다.

출입국 심사 안 받고 도주…총기 밀수도

한씨는 이순신 마리나의 요트에 머물다가 입항 3일 뒤인 9월 20일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세관 검사와 출입국 심사를 받지 않고 도주했다. 해외에서 구입한 권총을 들고서다. 밀입국과 동시에 총기 밀반입을 한 것이다.

밀수 총으로 지인 쏴 살해하려 해

더구나 한씨는 그날 세종으로 올라가 내연녀 A씨를 만났고 다툼 끝에 밀반입한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했다. A씨는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결국 한씨는 세종경찰서에 자수해 긴급체포됐다. 검찰은 한씨뿐 아니라 한씨를 애초에 남해안 안보망에서 걸러내지 못한 해경과 검역소, 출입국사무소, 세관에도 책임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여수해양경찰서. [뉴스1]

여수해양경찰서. [뉴스1]

해경 “우린 할 일 다 해”

이에 대해 요트 사고를 수습하며 한씨의 신병을 확보했던 여수 해경은 “한씨를 구조한 뒤 여수출입국·외국인사무소와 여수세관, 여수검역소 등에 통보했다”며 “이후 검역 조치만 이뤄진 채 한씨가 도주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씨의 지명수배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경은 “당시 한씨는 구조가 필요한 교통사고 피해자이자 참고인이었고 수상한 거동이 없어 임의로 지명수배 사실을 조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밀수 총기를 수색하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검역소 “붙잡아 둘 권한 없어”

여수검역소는 “검역 절차 이후 한씨를 붙잡아둘 권한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수 해경과 여수검역소 안팎에선 “한씨가 나머지 수속도 제대로 받도록 적극적으로 관리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출입국사무소 “격리된 줄 알았는데…”

여수출입국·외국인사무소는 “해경의 통보를 받고 한씨가 요트 내에 격리돼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것으로 알았다”며 “유선으로 입국심사 절차를 안내했는데 20일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유선으로만 연락한 이유에 대해선 “한씨가 정박했던 이순신 마리나는 출입국 항이 아닌 탓에 담당 공무원이 상주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세관 “총기 밀반입 유감…대책 마련 중”

세관 당국도 출입국사무소와 비슷하게 대응했다. 여수세관은 관세청 대변인실을 통해 “한씨가 총기를 밀반입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관세청 관계자는 “유사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유관 기관들과 함께 인력, 장비, 시설을 확충하는 등의 대안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박동균 대구한의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대 테러 전문가 네트워크 회장)는 “최근 해안을 통해 테러 조직, 간첩, 마약 사범 등의 밀입국 시도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경각심을 높이고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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