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백성호의 현문우답]금강 스님 "내게 해남 미황사 불사는 사람 살리는 일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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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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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구나. 이게 진짜 사람 살리는 거구나!”

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금강(54) 스님을 만났다. 가벼운 바랑 하나 걸치고 올라온 금강 스님은 전남 땅끝마을, 해남 미황사의 주지다. 음습한 흉가에 가까웠던 천년고찰 미황사를 20년간 주지를 맡으며 현공 스님과 함께 ‘반도 최남단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바꾸어 놓았다. 뿐만 아니다. 미래 불교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구체적인 나침반도 제시했다. 이제 미황사는 독일과 스위스 관광청 책자에서도 소개하는 ‘글로벌 명찰(名刹)’이 됐다.

금강 스님은 "제가 어려서부터 자유룰 참 좋아했더라. 출가해서 그걸 찾았다. 어제를 떠나서 오늘을 사니까, 그게 늘 자유로운 거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금강 스님은 "제가 어려서부터 자유룰 참 좋아했더라. 출가해서 그걸 찾았다. 어제를 떠나서 오늘을 사니까, 그게 늘 자유로운 거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지금까지 ‘금강 스님’하면 ‘미황사’였고, ‘미황사’하면 ‘금강 스님’이었다. 그런 금강 스님이 주지 소임을 내려놓는다. 내년 2월 본사인 대흥사에서 신임 주지가 올 참이다. 아쉬워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달마산과 해남 앞바다, 그 사이에 피어 있는 사찰미에다 금강 스님이 장착한 마음공부 프로그램이 미황사를 ‘아주 특별한 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주 앉은 금강 스님에게 소회와 그 특별함의 뿌리를 물었다.

출가가 빨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출가를 했다. 무엇을 찾고자 했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는 ‘돌아가셨다’는 게 감이 와닿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니까 훨씬 더 크게 와닿더라. 한참 지나고서야 그 부재를 느꼈다. 삶과 죽음. 제가 출가한 이유는 한 마디로 ‘자유’였다.”
그건 어떤 자유였나.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님이 책을 한 권 주셨다. 학생들에게 참선도 가르쳐주시는 분이었다. 책 제목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었다. 처음에는 무협지처럼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다 밤에 책을 보는데 ‘본래 부처다’라는 대목이 나왔다. 순간, 충격을 받았다. 내 마음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책이 다 있지.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금강 스님이 처음 미황사에 간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은사 스님과 둘이서 마당을 넓히고, 무너진 축대를 쌓는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금강 스님은 "그때는 눈만 뜨면 일을 했다. 오로지 일만 했다. 일로서 큰 공부였다. 돌아보면 그런 에너지가 무심의 정진력이더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금강 스님이 처음 미황사에 간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은사 스님과 둘이서 마당을 넓히고, 무너진 축대를 쌓는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금강 스님은 "그때는 눈만 뜨면 일을 했다. 오로지 일만 했다. 일로서 큰 공부였다. 돌아보면 그런 에너지가 무심의 정진력이더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금강 스님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기대를 느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나는 너무나 답답했다. 그런 ‘기대받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해진 궤도, 작은 지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 그런 자유를 늘 꿈꾸었다.”

고1 때 동창 친구와 함께 해남 대흥사에 갔다가 지운 스님을 만났다. 지금은 은사 스님이다.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스님은 그냥 웃으며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다. 따라가서 땔감을 장만했다. “그길로 절집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주말에만 절에 와서 지냈다. 그러다가 잊을 수 없는 고양이 그림을 만났다.”

고양이 그림, 어떤 건가.
“은사 스님 방에 묵화가 한 점 걸려 있었다. 큰 고양이가 그려져 있고, 옆에는 한문이 적혀 있었다. 저는 어릴 때 고양이를 키워봤다. ‘스님, 이 고양이는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은사 스님께서 남전선사 이야기를 해주셨다. 중국의 절에 1000명의 대중이 살고 있었다. 500명은 동쪽에서, 500명은 서쪽에서 공부를 했다. 동쪽 스님들이 고양이를 한 마리 길렀다. 하루는 이 고양이가 서쪽 스님들에게 가서 귀여움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동쪽 스님들이 가서 보니 고양이가 서쪽에 그렇게 있었다. 그길로 동서간에 고양이를 두고서 시비가 벌어졌다. 남전 선사가 그 모습을 보고 한탄을 했다.”
금강 스님이 미황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들과 함께 절 뒤로 난 산책길을 걷고 있다.[중앙포토]

금강 스님이 미황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들과 함께 절 뒤로 난 산책길을 걷고 있다.[중앙포토]

뭐라고 한탄했나.
“시비를 끊기 위해서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데, 고양이 때문에 오히려 시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전 선사는 시비의 근원인 고양이를 잡고서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대중에게 ‘지금 고양이를 살릴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하라!”고 했다. 대중은 아무 말도 못했다. 은사 스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더니, ‘네가 한 번 남전 스님에게서 고양이를 빼앗아봐라’고 하셨다. 거기서 내 말문이 딱 막혀버렸다.”  

그날부터 그는 고양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잠을 자도 고양이, 잠을 깨도 고양이가 걱정됐다. 내가 시비가 끊어진 말 한 마디를 해야만 고양이를 살릴 수 있을 텐데. 버스 타고 학교에 왔다갔다 하면서도 그 생각만 했다.”

그 물음을 안고 출가한 금강 스님은 절에서 통학하며 고등학교 2ㆍ3학년을 마쳤다. 금강 스님은 백양사 방장을 지낸 서옹 스님의 손상좌다. 서옹 스님이  87~89세 때 3년간 곁에서 시봉을 했다. “서옹 스님 옆에서 가장 크게 배운 건 ‘청정함과 친절함’이다. 잡다한 게 하나도 없는 수행자의 청정함과 누가 찾아와도 친절하게 대하는 자비로움이다. 서옹 스님은 화를 내는 법이 아예 없으셨다. 그런데 하루는 제게 ‘나가!’하면서 화를 버럭 내셨다. 제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금강 스님은 "서옹 스님은 3년간 곁에서 모시며 배운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청정함과 친절함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금강 스님은 "서옹 스님은 3년간 곁에서 모시며 배운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청정함과 친절함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무슨 일 때문인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였다. 신문을 보시던 서옹 스님께서 ‘나라가 망했는데, 소위 정신적 지도자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다. 이튿날 아침에 부르셨다. 방문을 열고 한 발 들어서는데, ‘생각해 봤는가?’ 물으셨다. ‘아(니오)’하는데 ‘나가!’하셨다.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이튿날,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도 불려가 ‘나가!’라는 호통을 들었다.”
그래서 어떡했나.
“신문도 다 읽어보고, 아는 기자, 아는 교수에게 전화를 돌려서 다 물어보았다. 아무리 자료를 찾고, 아무리 파악을 해도 모르겠더라. 종단은 뭘 하고 있고, 이웃종교는 뭘 하고 있나 일일이 조사를 했다. 그러다가 ‘다 포기하고 그냥 내가 잘하는 것 하자’ 싶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픈 부위가 어디인가. 거길 치료하면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겠나. 당시 가장 아픈 사람들은 IMF 외환위기로 인한 실직자들이었다. 그때는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수없이 생겨날 때였다.”  
땅끝마을 전남 해남의 미황사. 절 뒤편에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폐사지나 다름 없던 미황사를 금강 스님과 전 주지 현공 스님이 30년에 걸쳐 아름다운 사찰로 바꾸어 놓았다. [사진작가 김성철]

땅끝마을 전남 해남의 미황사. 절 뒤편에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폐사지나 다름 없던 미황사를 금강 스님과 전 주지 현공 스님이 30년에 걸쳐 아름다운 사찰로 바꾸어 놓았다. [사진작가 김성철]

금강 스님은 서옹 스님께 “IMF 실직자를 위한 단기출가 수련회를 하겠다”고 말했다. 서옹 스님은 “나가!” 대신 “해봐!”라고 답했다. “돌이켜보면 저를 공부시킨 거였더라. 논문 찾고, 자료 찾고, 지적인 울타리 안에서만 해법을 찾는 저에게 정말 중한 게 뭔지 일깨워주신 거였다.”

무료였던 5박6일 실직자 수련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수련회는 5개월간 계속됐다. 당시에는 ‘템플스테이’란 말도 없을 때였다. “사회의 낙오자, 무능한 가장이 됐다는 생각에 자살을 하려다 마지막으로 백양사에 왔다. 여기서 참선하고, 산행하고, 차 마시고, 스님과 차담도 나누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살면서 내가 미루었던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가 되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이제부터는 진짜 사람같이 살 수 있겠구나. 진짜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감문이 발표되면, 듣고 있던 실직자들도 다들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

실직자 수련회를 하면서 금강 스님은 무엇을 절감했나.
“의사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게 진짜 사람을 살리는 거구나. 삶의 의욕과 삶의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평생 할 일거리’를 찾았다. 그건 서옹 스님께서 주창하셨던 ‘참사람 운동’의 연장선이다. 미황사 불사에서도 내가 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금강 스님은 미황사에서 7박8일 참선 집중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를 무려 126회나 진행했다. 지금껏 참가자는 2000명이 넘는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문학당도 실은 마음 근육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인터뷰를 하던 금강 스님은 "번뇌 망상이 없는 본래 평화의 마음인 무념, 고정된 생각이 없이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무상,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대자유의 마음인 무주의 참사람 운동이 내 평생 해야 할 일거리"라며 웃었다. 장진영 기자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인터뷰를 하던 금강 스님은 "번뇌 망상이 없는 본래 평화의 마음인 무념, 고정된 생각이 없이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무상,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대자유의 마음인 무주의 참사람 운동이 내 평생 해야 할 일거리"라며 웃었다. 장진영 기자

인터뷰를 마치자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합장하며 돌아서던 금강 스님이 말했다. “이제는 떠날 때도 됐다. 미황사를 떠나는 건 공간만 달라질 뿐이다. 내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참사람 운동이다.” ‘고양이를 살리는 한 마디는 뭔가?’라고 물었더니 답을 툭 내던졌다. “날마다 좋은 날!” 미황사 안에서도, 미황사 밖에서도 날마다 좋은 날이다.

금강 스님과 전 주지 현공 스님은 30년에 걸쳐 미황사에 27채의 집을 새로 지었다. 2000년부터 어린이 한문학당, 2002년부터 템플스테이, 2005년부터는 참선 집중 수행 프로그램을 꾸렸다. 매년 10월이면 12m자리 괘불을 마당에 걸고 마을 축제를 벌였다. 매년 4000명이 미황사를 찾는다. 폐허나 다름 없던 천년고찰 미황사가 되살아났다. 금강 스님이 앞으로 꾸려낼 ‘제2의 미황사’ ‘제3의 미황사’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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