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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포 올, 올 포 원’ 새긴 럭비복 입었다 반공법 걸려 체포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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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3대째 가업 이은 ‘한스스포츠’

한스스포츠 2대 대표 한상화씨(아래)와 아들인 3대 대표 한성희씨가 한스스포츠에서 만든 럭비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신인섭 기자

한스스포츠 2대 대표 한상화씨(아래)와 아들인 3대 대표 한성희씨가 한스스포츠에서 만든 럭비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신인섭 기자

서울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장충체육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오르막 골목이 나온다. 그 골목 초입에 3층 건물이 있다. 이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국 럭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보물창고가 나온다.

한국 럭비 산역사, 동대문 노포 #1946년 일본인 공장 인수해 창업 #마지막 남은 국산 스포츠 브랜드 #80년 된 공, 연대별 스터드 등 #럭비 관련 용품 가득한 보물창고 #3대 한성희, 음악 접고 가업 이어 #“아들이 물려받으면 적극 도울것”

이 건물의 이름은 ‘한스스포츠’. 1946년 창업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스포츠용품 제조 겸 유통업체다. 고인이 된 한익수 선생이 해방 직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을 인수해 럭비복과 럭비공 등을 만든 게 시초였다.

한 선생의 4남2녀 중 둘째인 한상화(71) 씨가 가업을 물려받아 2대 대표가 됐다. 스포츠 용품을 생산하면서 동대문야구장 1층에서 동도체육사-창신체육사로 이름을 바꿔가며 용품을 팔았다. 한익수 선생은 체육사에서 번 돈으로 인근에 3층 건물을 샀다.

야구의 중심이 동대문(고교야구)에서 잠실(프로야구)로 넘어가고,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대문의 스포츠 상권은 급속히 위축됐다. 선친이 돌아가실 무렵 한 대표는 이 건물로 터전을 옮긴다. 그러면서 럭비 용품 제조 쪽으로 포커스를 맞췄다. 이름도 바꿨다. 한 대표는 “스포츠 선진국에선 설립자의 이름을 브랜드 명으로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한씨가 대를 이어 하는 거니까 복수로 ‘한스스포츠’라고 이름을 지었지요”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럭비는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 종목이다. 중·고·대 합쳐 럭비 팀이 50개 정도 되는데 한 학교에서 연간 1000만원을 팔아줘야 매출 5억원이다. 그나마 연세대·고려대는 글로벌 브랜드의 후원을 받는다.

20년 전 대표팀 유니폼, 영국 박물관 전시

한상화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80년 된 럭비공. 신인섭 기자

한상화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80년 된 럭비공. 신인섭 기자

한때는 일본에 1년에 럭비공 2000개 이상을 수출하기도 했다. 일본 명문 대학 팀의 유니폼도 납품했다. 20여년 전 한국 국가대표팀이 입었던, 한스스포츠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은 영국 럭비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한스스포츠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성희(40) 대표가 물건을 포장하고 옮기느라 분주하다. 한성희 대표는 한상화 2대 대표의 아들이다. 3층에 있는 한상화 대표의 사무실은 흡사 럭비 박물관 같다. 1940년대 럭비공부터 시작해 럭비화 밑창에 끼우는 속칭 ‘뽕’이라고 하는 스터드를 연대별로 모아놓은 것도 있다. 페넌트·열쇠고리 등 세계 각국의 럭비와 관련된 용품은 다 있는 것 같다.

한 대표는 “뭐든지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어요. 외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보고 깜짝 놀라지요. 80년 된 럭비공은 일본 ‘셉타’라는 제품인데 자기들도 그 공이 없다며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팔라’고 합니다. 사실 내가 죽으면 이게 다 쓰레기가 되지요. 이 건물에 여유 공간이 있으면 제대로 전시해 놓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서울 한성고 럭비부 유니폼. 신인섭 기자

서울 한성고 럭비부 유니폼. 신인섭 기자

아들 한 대표가 3층으로 올라왔다. 한상화 대표는 “아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맡긴 것 같아서 고마우면서도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고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한성희 대표는 “아버지는 한 번도 가업을 이으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어릴 적 늘 봐 왔던 게 엄마와 할머니는 럭비공 만드시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럭비복 옮기는 거였거든요. 언젠가는 저게 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은 했지요”라며 웃었다.

한성희 대표는 3대를 이어온 가업에 대해 “대한민국 럭비의 역사와 함께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죠. 그렇지만 시장이 너무 작다는 게 늘 안타까웠습니다”라며 “초등학생인 제 아들이 4대째 가업을 잇겠다고 하면 전폭 지원할 겁니다. 아버지가 강요 안 하신 것처럼 저도 강요는 안할 겁니다. 대신 아들이 대를 이어서 할 만하다는 얘기를 듣도록 한스스포츠를 탄탄하게 만들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밝혔다. 일본어를 전공한 한성희 대표는 이 사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가서 영어와 럭비를 배웠다.

부자(父子)는 회사 운영과 사업 방향에 대해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많이 싸우면서 서로 배워나가고 있죠. 누구 생각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보는 시선이 다를 뿐이죠”라고 했다.

일본에 한때 럭비공 연 2000개 이상 수출

한상화 대표는 동대문에서 함께 사업했던 사람들 소식을 종종 듣는다. 누구는 망했고, 누구는 사업 접었고…. 한 대표도 “이제 진짜 내 차례인가 싶어요. 한스스포츠가 마지막 토종 브랜드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나마 이거(건물)라도 가지고 있어서 견뎌내는 거죠. 한 달 임대료 몇백만원에 인건비 내고는 못 버텨요. 저희는 공장(신림동)에서 아내가 몇 사람 몫을 하고, 사무실에서 아들이 해 주니까 고생스럽긴 해도 버틸 수는 있지요”라고 한숨을 쉬었다.

한스스포츠 1∼3대 대표 중 누구도 럭비를 직접 해본 적은 없다. 그래도 럭비사랑만큼은 엘리트 선수 출신 못지않다. 한상화 대표는 서울시럭비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스배 럭비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이 사업을 하면서 유치장에 갔다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원 포 올, 올 포 원(One for All, All for One)’이라는 럭비 격언이 있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라는 의미가 좋다며 럭비복에 그 문구를 넣어달라는 손님이 있었다. 그걸 입고 돌아다녔는데 어느날 중부경찰서 형사가 와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라며 끌고 갔다. 공산주의 사상을 담은 문구라는 것이었다. 유치장에서 럭비협회 사무국장한테 SOS를 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얘기다.

한익수 선생은 한스스포츠를 일으켜 4남2녀를 반듯하게 키웠다. 한상화 대표도 한스스포츠의 힘으로 남매를 키워 가정을 꾸리게 했다. 이제 그 아들이 가업을 잇고, 아들의 아들이 자랑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고 한다. 노포(老鋪)는 아름답다.

박스컵 때 동대문구장 암표상 기승, 헌병들이 단속

중앙일보 주최 대통령배 야구대회가 열리던 동대문야구장. [중앙포토]

중앙일보 주최 대통령배 야구대회가 열리던 동대문야구장. [중앙포토]

동대문축구장과 야구장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한상화 대표는 2008년 철거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선 이곳의 역사를 소상하게 꿰고 있다.

동대문야구장 1층에서 용품사를 할 때 얘기다. “당시 운동장 관리 직원은 어깨에 힘주는 자리였어요. 국가대표 축구 경기나 고교야구 대회가 열리면 공짜로 넣어달라는 청탁을 엄청나게 받았어요. 저도 그 직원한테 ‘형, 우리 친구들이 야구 보고 싶어하는데 세 명만 해줘’하면 넣어주는데 그게 공짜가 아니에요. 저녁 되면 영락없이 소주 한잔 먹자고 불러내 왕창 덮어씌우곤 했죠.”

박스컵(박대통령배 축구대회)이 열리면 암표상이 기승을 부렸다. 한 대표는 “판매한 티켓보다 관중 수가 훨씬 많았어요. 이게 문제가 되자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방사) 헌병들이 나와 표가 새나가거나 공짜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켰어요. 입장권을 받는 대로 드럼통에 넣고 불로 태웠는데도 여전히 암표가 성행하더라고요”라며 웃었다.

겨울에는 동대문스케이트장과 별도로 야구장 바닥에 비닐을 깔고 얼음을 얼려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 70년대 성탄·연말연시 선물로 스케이트화가 최고였다. 한 대표는 하루에 스케이트화 200개를 팔아본 적도 있다고 한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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