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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도 뒤 독일 정치, 거칠고 추해져 포퓰리즘 ‘꿈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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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호 27면

독일 통일 그 후 30년 〈2〉

1990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 연방총리 후보로 출마한 오스카 라퐁텐. 그는 사민당 탈당 후 민사당에 입당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1990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 연방총리 후보로 출마한 오스카 라퐁텐. 그는 사민당 탈당 후 민사당에 입당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독일 통일은 예상하지 못했던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동독(DDR) 전체가 통째로 독일연방공화국(BRD·서독)에 편입한 것이 아니라 동독 지역의 신연방주들이 개별적으로 통합을 선택했다. 브란덴부르크·작센·작센안할트·튀링겐·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5개 주는 동독 시절 거의 40년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동베를린은 서베를린과 합쳐져 베를린주가 됐다.

정치인 사생활, 본 수도 땐 쉬쉬 #천도 이후 갑자기 관심 표적 돼 #구동독 시절 교육 이념 무용지물 #가치 공백 탓 극우 스킨헤드 출현 #구서독 쪽도 정치적 변화에 몸살 #정치재단 등 민주주의 가치 전파

신연방주들의 독일연방 가입을 가능하게 했던 서독 기본법의 특별 규정은 원래 서독의 작은 연방주인 자를란트주 때문에 생겨났다. 프랑스와 맞닿아 있던 자를란트주는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당시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적인 특수 지위를 가졌다. 이렇게 생겨났던 서독 기본법상의 특수 규정으로 인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별도의 선거나 개헌 논의 없이 구동독 지역 신설 연방주들의 연방 가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됐다.

콜, 첫 총선 승리 98년까지 연방 총리로

그레고어 기지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사당 총재를 지냈다. 사진은 90년 12월 총선에 출마한 기지의 선거포스터.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그레고어 기지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사당 총재를 지냈다. 사진은 90년 12월 총선에 출마한 기지의 선거포스터.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서독 입장에서는 수개월간 이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된다면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국가에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될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초에는 잠정적 의미의 ‘기본법’으로 출발했던 서독 헌법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다. 통일 바로 다음 날인 1990년 10월 4일 통일 독일 연방의회가 첫 회의를 열었는데 519명의 기존 서독 연방의회 의원들과 함께 144명의 구동독 인민회의 의원들도 참석했다. 이는 통일협약에 포함된 사항이었다.

동독 출신 의원들 중에는 24명의 사회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은 동독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SED)을 계승하는 정당이었다. 90년 12월 2일 통일 후 첫 총선이 치러졌다. 선거는 당연히 통일 결과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으며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는 ‘통일 총리’로서 선거전을 이끄는 동시에 그에 걸맞은 프리미엄을 안고 선거에 임할 수 있었다. 결과는 콜 총리의 승리였다. 상대는 자를란트주 총리 출신의 사민당 오스카 라퐁텐이었다. 승리 후 콜 총리는 82년 집권 이후 네 번째로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총선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됐던 주제는 독일 통일 비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경험했던 흥분과 기쁨의 시간이 지나가자 거의 파산 상태에 놓여 있던 동독의 절망적인 경제 상황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했다. 뒤따른 민영화와 화폐 통합 과정을 겪으며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하면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연방의회.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연방의회.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그러나 콜 총리는 ‘꽃피는 경관’이 구동독 지역인 신연방주에 곧 펼쳐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한 세대 정도의 긴 시간을 놓고 보았을 때는 콜 총리의 이야기가 맞았지만 단기적으로 본다면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의 약속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사민당 라퐁텐은 처음부터 통일을 확고하게 반대했으며 언제나 통일로 인한 비용 측면만을 강조하면서 통일에 따른 세금 인상에 대해 경고했다. 91년 제1차 걸프전이 발발한 후 독일 몫의 추가 분담금이 발생하면서 소위 ‘연대세’ 명목으로 소득세에 부과하는 세금 인상이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최종적으로는 사민당의 논리를 지지하지 않았다. 기민당은 다음 선거에서 득표수가 소폭 줄었지만 사민당은 눈에 띌 만큼 훨씬 더 많은 표를 잃었다. 그 결과 기민·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은 82년부터 이어오던 연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후신 정당인 민사당이 의회에 진출한 사실을 제외하면 실제로 선거 결과는 매우 안정적인 결과를 보였다.

‘붉은색 양말’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한 94년 기민당의 선거 포스터. 붉은색 양말은 동독 시절 SED 간부들을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붉은색 양말’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한 94년 기민당의 선거 포스터. 붉은색 양말은 동독 시절 SED 간부들을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민사당이 의회 진입에 성공한 것은 선거에서 동서독 지역을 분리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소위 ‘5% 하한선’ 규정을 동서독 지역 중 어느 한쪽에서만 충족시키면 되도록 하는 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민사당은 통일 후 첫 총선에서 구서독 지역에서는 불과 0.3%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구동독 지역에서는 11%가 넘는 표를 얻었다. 그 결과 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하게 됐다.

당시 이들은 현실적으로 정치 지형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신연방주에서는 이들의 세력이 크게 확대돼서 수년 전부터는 일부 주에서는 주 총리 후보를 내는 상황까지 생겨났다. 사민당 내의 좌파 계열과 좌파 성향 노조원들이 민사당에 가세하면서 세력이 강화돼 심지어는 구서독 지역에서도 일정 정도의 유권자를 확보하게 됐다. 하지만 주요 당원들은 전신 정당이었던 구동독 SED 출신이며 이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관계로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통일 이후 정치 환경은 확실히 복잡해졌다. 동유럽의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전개 양상은 사뭇 달랐다. 이들 국가에서 공산당 후신 정당들은 새로운 야당의 주축을 이루거나 정권을 잡기도 했다. 통일로 인해 구동독 지역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반면 구서독 지역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연방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99년까지 연방의회와 연방정부를 라인 강변에 위치한 아담한 서독의 수도 본에서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옛 수도로의 천도 결정에는 동독 지역을 염두에 둔 표면적인 의견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독일 총선 결과. 검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기민·기사당 연합이 승리한 선거구이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지역이사민당이 승리한 선거구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1990년 독일 총선 결과. 검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기민·기사당 연합이 승리한 선거구이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지역이사민당이 승리한 선거구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이와 함께 정치 스타일의 변화 또한 생겨났다. 베를린 천도 이후에 정치는 개방적이면서도 거칠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본 시절에 정치인의 사생활은 언론에서 다루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야였는데 베를린 천도 이후에는 갑자기 관심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더욱 큰 이슈로 떠오른 것은 신연방주에서 생겨난 가치의 공백으로 인한 정치적 변화였다. 구동독 시절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동독 청소년들이 ‘에른스트-탤만-피오니어’와 ‘자유 독일 청년단(FDJ)’의 일원으로서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는데 통일이 되면서 자신들이 배운 이념은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공백을 대신할 종교 수업이나 여타 가치 교육은 전무했다. 청소년 중 일부는 극우화했으며 스킨헤드의 사례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그 수는 극히 일부였지만 구동독 지역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과거 사회주의 동독의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극우 정당들에 투표했으며 반대 성향의 사람들은 극좌주의에 경도됐다. 현재까지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일부 지역은 극좌주의자들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극우주의자들과 극좌주의자들은 서로 적대시하며 경찰은 두 그룹을 분리시키는 데 신경을 쓴다.

남북 통일 때 북 유산 얼마나 수용할지 의문

독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바이마르공화국 시절(1919~1933) 극단적인 정당들로 인해 매우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바 있다. 1933년 이전에 공산주의자들과 국가사회주의자(나치)들은 서로 적대시하며 대치하였지만 동시에 두 그룹이 공히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폭력 투쟁을 전개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독일에는 연방 정치 교육원이나 주 정치 교육원 또는 한스 자이델 재단과 같은 정치 재단 등, 청소년이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교육하는 여러 기관들이 활동하고 있다. 포퓰리즘의 출현과 ‘독일을 위한 대안 당(AfD)’과 같은 극우주의 정당의 정계 진출은 단지 통일만을 그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확실히 이전의 서독 시절보다는 베를린 천도 이후의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환경에서 훨씬 수월하게 발생한다.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에서만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구서독 지역에서도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독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이 통일되는 경우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과연 북한이 남긴 유산을 얼마나 수용하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번역: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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