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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백남준’ 모홀리나기, 예술과 기술 통합 새 지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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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9〉

디자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디자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콘텍스트’, 즉 ‘사회문화적 맥락’과 ‘내적 필연성’의 관계다. ‘추상’은 ‘맥락’을 그냥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맥락’과의 모순관계에서 파생된다. 이 과정을 칸딘스키는 3단계로 설명한다. 우선 ‘인상(Impression)’이다. 외부 세계와 직접 관계하며, 이를 표현하는 단계다. 두 번째는 내적 경험으로 걸러진 외부세계를 표현하는 ‘즉흥(Improvisation)’이다. 마지막 3단계는 ‘구성(Composition)’이다. 전적으로 내면의 이성·의도·목적 등에 의해 표출되는 단계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다. ‘청기사연감’을 준비하며 칸딘스키는 ‘인상’ ‘즉흥’ ‘구성’이라고 이름 붙인 다양한 형식의 추상회화 실험을 진행했다.

28세 최연소 선생 모홀리나기 #‘기계 미학’ 바탕 시각문화 혁명 #실용주의적 노선 대전환 이끌어 #‘빨간 사각형, 파란 원, 노란 삼각’ #칸딘스키, 색채·형태 관계 중시

그러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멈췄다. ‘추상’이란 결코 ‘콘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순적인 것임을 칸딘스키의 삶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추상회화를 향한 그의 열정은 내적·외적 조건들로 인해 시들해졌다. 무엇보다도 독일에서 그의 삶에 항상 동반했던 가브리엘 뮌터와의 사랑이 끝났다. 둘은 1916년 스톡홀름에서 잠시 만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2월, 칸딘스키는 공식적으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두 번째 아내는 러시아 장군의 딸 니나 안드레브스카야로, 칸딘스키보다 30살이나 어렸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반해 하루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후에 고백한다.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셀프포트레이트(1920). [사진 윤광준]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셀프포트레이트(1920). [사진 윤광준]

어린 신부를 얻었지만, 러시아에서 칸딘스키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혁명 후 러시아라는 사회문화적 상황과 ‘내적 필연성’에서 출발하는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는 서로 어울릴 수 없었다.

17년 혁명 이후, 좌파예술가들은 ‘나르콤프로스(Narkompros·인민계몽위원회)’라는 단체를 설립해 공산주의 문화예술정책을 수립해나갔다. 18년 칸딘스키는 나르콤프로스 산하 시각예술분과(IZO)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20년에는 ‘예술문화연구소(INKHUK)’를 주도적으로 창립해 초대 연구소장이 됐다. 칸딘스키는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싶었다. 그동안 꺼렸던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기하학적 추상도 이때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독일 돌아온 칸딘스키 ‘청색 4인방’ 조직

색채와 형태의 관계에 관해 ‘빨간 사각형, 파란 원형, 노란 삼각형’을 주장한 칸딘스키가 학생들에게 돌린 설문지. [사진 윤광준]

색채와 형태의 관계에 관해 ‘빨간 사각형, 파란 원형, 노란 삼각형’을 주장한 칸딘스키가 학생들에게 돌린 설문지. [사진 윤광준]

그러나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혁명이념 고취를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였다. 아울러 “예술은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유용한 물건생산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틀린, 로드첸코 주도의 ‘구축주의’가 대세였다. 여기서 ‘구축주의’란 ‘예술은 실용적이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적·합리적 사고를 기초로 물체의 재료특성들이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INKHUK에서는 연구소장 칸딘스키가 제시한 야심찬 계획들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 난도질했다. 칸딘스키가 주장하는 ‘정신적인 것’들의 표출인 예술이란 구시대적이며 동시에 지극히 비생산적이라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려있던 20년, 칸딘스키에게 또 다른 충격이 닥쳤다. 3년 전 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듬해 12월, 칸딘스키는 아내 니나와 함께 러시아를 빠져나와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리고 22년 6월 그로피우스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된다. 바우하우스는 당시 가장 유명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이자 예술교육가였던 칸딘스키를 초빙함으로써 바우하우스 이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생을 얻었다. 아울러 바우하우스를 향한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공격을 잠재울 수 있는 50대 후반의 노련한 리더도 얻게 됐다. 러시아에서의 혹독했던 경험은 칸딘스키에게 아주 훌륭한 자산이 됐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행복했다. 자신의 예술이념을 원 없이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청기사파’에서 함께 활동했던 오랜 친구 클레도 먼저 바우하우스에 와 있었다. 클레와 칸딘스키는 데사우로 바우하우스가 옮겨갔을 때, 같은 마이스터하우스에서 살기도 했다. 24년 칸딘스키와 클레는 파이닝거·야블렌스키와 함께 ‘청색 4인방(Die blaue Vier)’을 조직해 전시회도 열었다. ‘청기사파’의 재건이었다.

칸딘스키와 클레가 함께 살았던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하우스. [사진 윤광준]

칸딘스키와 클레가 함께 살았던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하우스. [사진 윤광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벽화 공방을 지도했다. 공방 교육에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대부분의 선생과 달리 칸딘스키는 교육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벽화와 건축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공간을 다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색채와 형태의 관계에 관한 칸딘스키의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색채가 가진 힘, 즉 색채의 물리·화학적 특징과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효과,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공간 처리와 디자인을 실습하도록 했다. 색채와 형태의 공감각적 경험을 기초로 3차원 공간의 창조적 구성을 벽화 공방의 교육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칸딘스키에게 벽화는 건축의 부속작업이 아니었다. 벽면의 색채 및 형태 구성은 건축 공간의 종합적 조형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었다.

벽화 공방과는 별도로 칸딘스키는 클레와 함께 이텐이 떠난 예비과정에서 색채론과 형태론을 강의했다. 칸딘스키와 클레가 추구하는 예술의 내용은 비슷했지만 강의 방식은 사뭇 달랐다. 클레는 조심스러웠고, 칸딘스키는 과감했다. 클레는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칸딘스키는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했다.

칸딘스키와 클레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칸딘스키는 ‘색의 원근법’과 관련해 “흰색은 앞으로 나아가고, 검은색은 뒤로 물러난다”고 단언했다. 한 학생이 검은 면에 흰색의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이는 굴뚝을 통해 바깥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흰색이 원근법적으로 뒤쪽에 있는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그리고 클레에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판명해달라고 했다. 클레는 빙긋이 웃으면서 “흰색이 앞으로 갈 수도 있고, 뒤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바우하우스의 또 다른 선생 오스카 슐레머는 삼원색과 기하학적 기본구조의 관계에 관한 칸딘스키의 주장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색채와 형태의 관계가 어떻게 ‘빨간 사각형, 파란 원형, 노란 삼각형’으로만 고정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정할 때까지는 깊게 생각하지만, 한 번 결정되면 웬만해선 자기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모홀리나기, 칸딘스키처럼 법학 공부

이 같은 성격의 칸딘스키는 자유분방한 학생들로부터 자주 반발을 샀다. 하지만 항상 위기상황이었던 바우하우스의 구성원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정신적 지주였다. 데사우를 거쳐 베를린으로 바우하우스가 옮겨가는 동안 대부분의 선생들이 떠나갔지만, 칸딘스키는 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될 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23년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내용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였다. 설립 초기부터 지속되었던 그로피우스와 이텐의 갈등이 이텐의 사임으로 일단락되었고, 칸딘스키를 비롯한 매력적인 선생들이 속속 취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대외적 위상은 높아져 갔다. 유럽 전체가 독일이 작은 도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를 궁금해 했다.

마침내 또 한 명의 선생이 바우하우스의 이념적 노선에 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23년 합류 당시 28세로 바우하우스 최연소 선생이 된 라즐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1895~1946)다. 이텐의 후임으로 초빙된 그는 표현주의를 비롯한 각종 아방가르드적 경향이 혼재했던 바우하우스가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실용주의적, 기능주의적 노선으로의 이념적 대전환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모홀리나기는 칸딘스키처럼 법학을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전쟁 후 미술을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해, 빈을 거쳐 베를린에 정착했다. 베를린에서 경험한 구성주의, 데 스틸의 신조형주의는 모홀리나기의 예술관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그에게 전쟁 후 새로운 세계를 이끄는 키워드는 ‘기계’였다. 그의 ‘기계 미학’은 바우하우스에 참여한 이후 무대미술, 타이포그래피, 북 디자인을 포함하는 출판편집, 건축과 인테리어, 사진 및 영화 등 다방면에서 펼쳐졌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적극 수용해 시각문화 전반에 걸쳐 혁명적 활동을 펼쳤던 그는 ‘유럽의 백남준’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백남준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바그너, 클링거, 클림트로 출발해 칸딘스키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구성원들로 이어졌던 ‘종합예술’의 시도는 모홀리나기를 통해 상상도 못 했던 차원으로 편집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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