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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가족에 헌신하지만 따돌림…억울한 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7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는 무엇일까? 어머니다. 뉴스에 의하면 영국문화협회에서 102개 비영어권 국민 4만여 명에게 70개 단어를 제시하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고르도록 한 결과 ‘어머니’가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그 뒤를 ‘열정’과 ‘미소’, ‘영원’이 나란히 이었으며 ‘딸꾹질’이 63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몇 위였을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건가? 우리나라에서도 초등학교 2학년의 동시가 매체에 보도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일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걸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 무렵의 자녀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게 무어냐 물으니 1순위가 큰소리치는 사람, 2순위가 술 마시는 사람이며, 3순위 TV 보는 사람이다. [사진 pixnio]

사춘기 무렵의 자녀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게 무어냐 물으니 1순위가 큰소리치는 사람, 2순위가 술 마시는 사람이며, 3순위 TV 보는 사람이다. [사진 pixnio]

청소년에겐 또 아버지가 어떻게 비칠까? 사춘기 무렵의 자녀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게 무어냐고 물으니 1순위가 큰소리치는 사람, 2순위가 술 마시는 사람이며, 3순위 TV 보는 사람, 4순위 잠자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버지란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머니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어머니 못지않게 자식에게 애정을 갖고 헌신하건만 부정의 대상이 되거나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주지하다시피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일에 얽매여 지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에게 일은 버겁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괴롭기도 하다. 아버지도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언제나 뒷전이다.

게다가 요즘 같은 때는 언제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몰라 항상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해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대개의 인간관계가 일 중심의 이해관계로 맺어져 자기의 고민을 진정하게 소통할 사람도 거의 없다. 친구, 친척과의 관계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며 소원해지기 쉽다. 아버지의 알량한 사회생활의 밑천이 드러나는 건 정작 퇴직을 하고 나서다.

아버지가 화제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13년 전 이맘때쯤 IMF 외환위기로 우리나라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아버지도 직장을 잃었다. 예전 같으면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었는데 당시엔 거의 모든 기업이 구조조정을 할 때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말수가 적어졌고 방에서 혼자 한숨을 쉴 때가 많았다. 기껏해야 허름한 차림의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찾는 게 고작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던 아버지가 집에 있자 아이들은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로소 아버지란 누구인가 묻기 시작했다. 아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 당시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주고받은 글을 책으로 엮었는데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다음과 같다.

4세-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8세-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30세-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여보, 우리가 이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
50세-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인상을 보면 아이가 자라 아버지의 위치가 되어선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자식이 효도하고자 해도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남자의 기대수명은 79세다. 반면 여자는 86세다. 수명이 짧은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소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별 자살률을 보면 한국이 10만 명당 25.8명으로 단연 1위다. 반면 터키는 2.1명에 불과하다. 거의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특히 남자의 자살률은 38.5명으로 여자 14.8명보다 2.6배 높다.

OECD 자살률 통계. [자료=통계청]

OECD 자살률 통계. [자료=통계청]

언젠가 중고생을 대상으로 ‘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라는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남학생의 경우는 아버지를 꼽았다. 아버지가 되는 것을 망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남학생은 자신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왜 거부하는 걸까? 자식을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가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한국의 출산율이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에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이 된다. 아버지가 되겠다는 청소년이 늘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전에 친구끼리 모여 아버지의 위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자신은 바람직한 아버지상에 대해 교육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배운 것은 자라면서 본 그의 아버지 모습에서다.

근엄한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어떨까. 아이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취미도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사진 pixabay]

근엄한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어떨까. 아이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취미도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사진 pixabay]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가부장제 사회였다. 국가도 그렇다.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만큼 책임이 무거우며 잘못하면 그에게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따돌림을 받는 것은 이러한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도 있다. 이제는 가정에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는 것이다. 과거를 보면 학과의 선택도 부모의 강권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가야금의 명장 황병기 선생도 부모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해야 했다. 주위에는 고교 재학 중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그러하지 못한 사람도 꽤 있다.

근엄한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어떨까. 아이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취미도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친구의 아내가 기타를 잘 쳐서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아버지가 귀가하면 뚝 그쳤다고 한다. 아마 평소에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자신도 아이와 어울릴 수 있는 악기를 하나 배웠으면 한다. 젊은 부부 중에는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젊은 세대도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고 칭하며 놀리기보다 그들의 경험에서 배우고 예의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자신도 그 위치에 오를 것 아닌가. 최근 코로나 감염으로 몇몇 대기업에서 인력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이제 곧 IMF 외환위기처럼 타의로 직장을 퇴직해야 하는 사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조차 그들을 도외시해선 안 되겠다. 바로 우리를 길러준 아버지가 아닌가.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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