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톨레랑스의 나라는 어쩌다 테러의 온상이 됐을까

중앙일보

입력 2020.12.04 00:21

업데이트 2020.12.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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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콘텐트제작에디터-사회

[윤석만의 인간혁명]불평등이 부른 정치위기

2018년 2월 미국 보수 주의연맹 총회의 연사로 나선 마리옹 마레 샬 르펜. 이날 총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차용해 ‘프랑스 퍼스트’를 외쳤다. 특히 자국의 무슬림을 비판하며 반이민자 정서를 자극했다. [AP=연합뉴스]

2018년 2월 미국 보수 주의연맹 총회의 연사로 나선 마리옹 마레 샬 르펜. 이날 총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차용해 ‘프랑스 퍼스트’를 외쳤다. 특히 자국의 무슬림을 비판하며 반이민자 정서를 자극했다. [AP=연합뉴스]

인물·개념
장 마리 르펜

장 마리 르펜

장 마리 르펜
(1928~). 극우정당인 국민전선(현 국민연합)의 창립자. 이민자에 적대적이며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5차례 대선에 출마한 그는 2002년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지만 결선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에 패배했다.

프랑스 양극화로 극우 정서 확산
한국도 중산층 옅어지며 편가르기
대중의 분노 자극해 소수자 공격
자유·법치·다양성 등 가치 무너져

je suis charlie

je suis charlie

내가 샤를리다
Je suis Charlie. 2015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추모 구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사무실에 난입, 총기를 난사해 12명을 죽였다. 지난 10월 학교 수업에 이 신문의 만평을 사용한 교사 사뮈엘 파티는 무슬림 학생에 의해 참수됐다.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프랑스 무슬림
식민지였던 알제리·모로코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해왔으나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이후 무슬림이 급증했다. 성장이 정체되고 실업률 치솟으며 반감이 커졌다. 현재 8.7%인 무슬림 인구는 30년 후 20%로 전망된다(퓨리서치센터).

“2022년 30대의 마레샬이 도전장을 내밀고 마크롱을 격파할지도 모른다.”

『세계화의 덫』으로 유명한 독일 지식인 한스 페터 마르틴은 최신작 『게임오버』에서 마리옹 마레샬 르펜(30)이 “(다음 대선에서) 잔 다르크가 돼 전장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러면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전진(En Marche)’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죠. ‘전진’은 마크롱이 만든 정당 ‘전진하는 공화국(La République En Marche)’의 준말입니다.

도대체 마레샬이 누구기에 잔 다르크라고 불릴까요. 그의 할아버지는 극우정당인 국민전선(현 국민연합)의 창립자 장 마리 르펜입니다. 이모는 국민연합의 당수인 마린 르펜이고요. 2017년 대선에서 마린(21.3%)은 마크롱(24%)을 2.7% 차이로 추격하며 극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의 유명 작가 미셸 우엘벡은 일찌감치 국민연합의 2022년 대선 승리를 예측했죠.

가문의 후광으로 22세에 국회의원이 된 마레샬은 뛰어난 언변과 수려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젊고 치명적인 매력”(마르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는 2017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대권 직행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모 마린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성 ‘르펜’을 공식 사용하지 않고 ‘마린보다 더 보수적이고 전투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보수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정치경제연구소(ISSEP)를 설립해 지식인의 망토까지 걸쳤고요.

2018년 2월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보수주의연맹 총회의 연사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차용한 ‘France First’를 선언하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정치적 후견인으로 영입하는 등 극우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죠. 당시 마레샬은 “프랑스는 지금 가톨릭의 큰딸에서 이슬람의 어린 조카로 바뀌고 있다”며 대놓고 반무슬림을 표방했습니다.

톨레랑스(tolérance·관용)의 나라가 어쩌다 르펜 가문과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을 유력 정치인으로 키웠을까요. 이민자가 급증한 프랑스에선 최악의 실업률로 경제난이 가속됐고, 르펜 같은 극우 정치인들이 무슬림에게 그 원인을 돌렸습니다.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까지 벌어지면서 반이민자 정서는 더욱 커졌죠.

불평등이 부른 민주주의 위기

개츠비 함수

개츠비 함수

이런 갈등의 핵심 원인은 불평등입니다. 마르틴은 “구조화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는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60%가량을 소유하고 있고 최상위 1%가 25%를 갖고 있습니다. 소득의 경우 최상위 1%의 점유율이 1980년 7%에서 2019년 10%로 높아졌고요. 토마 피케티는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에서도 좌우 극단의 논리가 독버섯처럼 커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자본과 이데올로기』).

앨런 크루거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위대한 개츠비 함수’로 이를 설명합니다. 현재의 소득 불평등을 X축으로, 경제적 지위가 세습되는 정도인 소득 탄력성을 Y축으로 놓고 주요 국가들을 따져봤습니다. 두 값이 모두 큰 나라는 프랑스와 미국·영국·이탈리아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었죠.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2000년대 이후 극우 정치인이 판치며 민주주의를 위기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미 존스 홉킨스대 교수인 야스차 뭉크는 “프랑스와 비슷한 일들이 미국과 오스트리아·그리스에서도 일어난다”며 “수십년간 좌우 포퓰리즘 정당의 득표율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지적합니다(『위험한 민주주의』). “세계화 이후의 성장은 개발도상국에만 집중됐고, 선진국에선 성장의 과실이 소수 엘리트에만 돌아갔기 때문”이죠.

마르틴도 “모두가 가난한 건 참을 수 있어도 소수만 계속 부유해지는 건 견디기 어렵다”며 “성장이 정체된 대부분의 선진국이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불평등이 커질수록 관대함이 줄고 비윤리적이 된다”고 말하죠. 양극화의 심화로 중산층이 옅어지며 민주적 가치들까지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좌우 극단의 정치인들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는 GDP가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애덤 셰보르스키의 이론과도 맥락이 비슷합니다. 그는 1950~1990년 세계 여러 나라를 조사해 1985년 기준 1인당 GDP가 6000달러(534만원, 1985년 12월 환율 890원 기준) 이상이어야 “민주 정권이 붕괴(500분의 1)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500달러 미만인 나라는 평균 8년 후 무너졌고요.

물질적 기초가 탄탄해져야 ‘먹고사니즘’을 넘어 자유와 인권·법치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인당 GDP가 높아도 양극단의 값이 크고 평균만 높으면 민주주의엔 빨간불이 들어오죠. 박희제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합리적 사고와 숙의가 가능한 중산층이 두텁지 않으면 부자와 빈자로 분열된 극단의 정치가 고개를 든다”고 말합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민주화로 귀결될 수 있던 것도 운동의 주체가 중산층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도세력은 학생이었을지 몰라도 넥타이 부대 같은 중산층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이야기죠. 반대로 기층민이 중심이 되면 “볼셰비키 같은 사회주의 혁명이나 베네수엘라처럼 사회주의 외양을 한 좌파 포퓰리즘이 될”(박희제 교수) 가능성이 큽니다.

87년 민주화는 중산층의 업적

결국 한국의 민주화는 586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중산층의 업적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집권세력은 민주화를 자신만의 전유물처럼 내세우며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릅니다. 특히 심해지는 불평등을 악용해 부자와 빈자를 나눠 갈등을 조장하고, 임대인과 임차인을 갈라 싸우게 만들고 있죠.

소수인 부자들만 콕 집어 세금을 대폭 늘리는 ‘부자 증세’가 대표적입니다. 내년부터 최고 45%의 소득세를 적용하고, 종합부동산세(최고세율)을 3.2%에서 6%로 올릴 예정입니다. 급격한 핀셋 증세가 불합리하다는 비판에는 대상이 1만 1000명(전체 소득자의 0.05%)에 불과해 별문제가 없다는 논리로 항변합니다.

전체 근로자 10명 중 4명(38.9%)이 실질 세금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증세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정부들이 손쉬운 ‘부자 증세’를 택하지 않은 것은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의 국민개세주의(헌법 38조)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함이었죠. 특정계층에 집중된 조세는 근로의욕을 꺾고 포퓰리즘을 부릅니다. 지금도 이미 소득 상위 10%가 전체 세금의 78.3%를 부담하는 상황입니다.

패를 갈라 다수의 적대감을 자극해 소수를 적으로 모는 행태는 다른 정책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여권은 윤미향 의원을 비판한 이용수 할머니까지 ‘토착왜구’로 몰고, ‘조국 사태’로 부모 찬스가 논란되자 문제를 제도 탓으로 돌리며 자사고 일괄 폐지를 밀어붙였습니다. 전국 2000여개 고교 중 자사고는 28곳뿐이어서 다수의 논리로 결정하면 자사고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빈부격차가 커지고 좌우 극단으로 쏠린 사회에선 합리적인 중간계층이 설 자리가 부족합니다. 포퓰리스트는 서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부자를 공격하고, 다시 다수의 횡포를 통해 의견이 다른 집단과 소수자를 압박합니다. 그러면서 법치와 자유·다양성 같은 민주주의 원칙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죠. 베네수엘라와 그리스가 그렇게 쇠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치적 중산층입니다. 편 가르기가 고착된 사회에서 이성과 합리로 사고할 수 있는 공중이 있어야 하죠. 자유로운 개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성취를 이루고, 노력에 따른 보상의 과정이 공정한지 따져야 합니다. 국가는 소외된 자에게 직접 빵을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야 하고요. 그렇게 중산층이 두터워져야만 민주주의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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