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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코로나 직격탄 맞은 수제맥주 양조장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57)

아빠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작은 마트를 ‘우리집 냉장고’ 또는 ‘식량 창고’라고 불렀다. 시원한 맥주가 필요한 때도, 쌀이 똑 떨어졌을 때도 언제든 몇 발자국만 걸어가서 가져오면(사오면) 된다는 말이었다. 차를 몰고 가야 하는 대형마트보다 가격이 비쌀 때도, 물건이 시원찮을 때도 있었지만 아빠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외출해서 대형마트에 들를 기회가 있을 때도 굳이 집 근처까지 와서 쇼핑하셨다. 동네 가게가 없어지면 결국 우리가 손해라는 이유였다. 복날 전을 부쳤는데 막걸리가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사와야 한다면 얼마나 행복도가 떨어지겠냐는 아빠의 논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맥주를 파는 곳이 있느냐는 매우 큰 이슈다. 이른바 '주(酒)세권'이다. [사진 황지혜]

주변에 맥주를 파는 곳이 있느냐는 매우 큰 이슈다. 이른바 '주(酒)세권'이다. [사진 황지혜]

최근 ‘슬리퍼를 신고 이용 가능한 상권’을 의미하는 ‘슬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꺼리게 되면서 집 근처 편의시설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스타벅스가 가까운 곳을 뜻하는 ‘스세권’과 함께 편세권(편의점), 숲세권(녹지), 맥세권(맥도널드) 등이 쓰이고 있다.

코로나19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된 요즘 이런 X세권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잠깐의 외출로 원하는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데 큰 가치가 느껴진다. 점점 더 주변의 점포, 시설이 생활의 질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변에 맥주를 파는 곳이 있느냐는 매우 큰 이슈다. 이른바 ‘주(酒)세권’이다. 아무리 쿠팡 로켓배송, 마켓컬리 새벽배송 가능 권역에 살더라도 맥주를 조달하는 데는 별 소용이 없다. 맥주는 배달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목마른 자가 직접 사와야 하기에 주변의 맥주 가게는 더욱 소중하다.

물론 일반적인 캔‧병맥주를 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생맥주나 편의점에서 다루지 않는 맥주를 마시려면 맥줏집(펍), 보틀숍 등 인근 업장의 중요성이 커진다. 집 주변에 생맥주를 제대로 다루는 맥줏집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생맥주 시스템을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하면서 생맥주의 맛을 최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 다양한 맥주를 판매하는 펍이나 보틀숍이 있다면 편의점에서 채워지지 않는 다양성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직접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 근처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갓 완성된 맥주의 맛은 그 어떤 맥주의 맛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다.

코로나19 시대에 주변 맥주 가게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더 많아졌다. 개인적인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네 경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주변 상권의 흥망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동산 가격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수제맥주 관련 업계에서는 ‘드링크 로컬’이라는 캠페인을 지속해서 펼쳐왔다.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를 마시자는 운동이다.

'스몰 브루어리 선데이' 캠페인 로고. [사진 미국 양조사협회(Brewers Association)]

'스몰 브루어리 선데이' 캠페인 로고. [사진 미국 양조사협회(Brewers Association)]

최근에는 양조장, 펍, 유통사 관계자 등 5400명 이상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미국 양조사협회가 ‘스몰 브루어리 선데이’를 지정하기도 했다. 인근 작은 양조장에 가서 맥주 마시는 날을 만든 것이다. 동네 상권을 지키자는 취지의 캠페인인 스몰 비즈니스 새터데이(11월 28일)와 대규모 온라인 할인이 펼쳐지는 사이버 먼데이(11월 30일) 사이인 11월 29일을 스몰 브루어리 선데이로 지정했다.

미국의 경우 전체 8300여개의 맥주 양조장 중 72%에 이르는 6000여개가 소규모 양조장이다. 소규모 양조장은 대부분 캔이나 병이 아닌 생맥주 형태로 업장에서 맥주를 판매하기 때문에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 미국은 전체 인구의 3분의 2가 맥주 양조장에서 10마일(약 16㎞) 이내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 동네 맥주를 소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서포트 로컬 캠페인 로고. [사진 음미하다 페이스북]

서포트 로컬 캠페인 로고. [사진 음미하다 페이스북]

국내에서도 최근 주변의 수제맥주 관련 업장을 지키자는 취지의 ‘서포트 로컬’ 캠페인이 시작됐다. 주변의 펍, 보틀숍, 양조장 등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인해 소규모 양조장의 어려움이 극심해지고 있다. 국산 캔 수제맥주가 부각되면서 전체 수제맥주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 업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수제맥주 비즈니스는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 150여개의 수제맥주 양조장 중 편의점에 공급할 역량이 되는 곳은 6~7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거리두기 등으로 고사 위기에 놓여있다.

주세권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주변 맥줏집, 보틀숍, 양조장이 없어지면 맛있는 맥주를 마실 기회를 잃게 된다. 주변의 수제맥주 관련 업장에 대한 정보는 비어라이킷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지도를 기반으로 펍, 브루어리, 탭룸, 브루펍, 바틀샵 등을 검색해서 찾아가면 된다.

오늘은 유난히 생맥주 탭에서 바로 뽑은 신선한 맥주 한잔이 그립다. 근처 펍에 들러 그라울러에 맥주를 가득 담아와야겠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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