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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닮은꼴, 윤석열과 월성1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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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디렉터

김원배 사회디렉터

2019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11시24분36초~다음 날 오전 1시16분30초. 보통 사람이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산업통상자원부 소속 공무원 G는 이 시간에 사무실로 들어가 업무용 PC에 저장된 월성1호기 원전 관련 자료를 삭제했다. 해당 PC가 다른 동료 직원에게 넘어갔음에도 비밀번호를 받아 자료 삭제를 했다.

임기제 총장 억지 해임은 법치 파괴 #원전 자료 삭제 공무원은 반면교사 #내일 징계위, 상식에 따라 결정해야

“자료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씀드리면 마음에 켕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10월 감사원이 공개한 감사자료 보고서 각주에 달린 공무원 G의 진술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료 삭제는 G의 상관인 국장이 지시했고, 과장은 “삭제는 주말에 하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공무원 G는 자료를 삭제하기 위해 수차례 기회를 봤다. 낮에는 다른 직원이 PC를 쓰고 있고 평일 저녁엔 야근하는 사람이 많아 부담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12월 2일 감사원 감사관과의 면담이 잡히자 삭제를 결행한다. 왜 마음이 켕겼을까.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사건에 관여한 국장과 과장, 공무원 G는 이후 승진하거나 영전했다. 만일 과거 정부에서 했던 유사한 자료 삭제가 지금 들통났다면 관련자들은 벌써 징계를 받거나 감방에 갔을 것이다.

서소문포럼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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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1호기는 2012년 11월 설계수명이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5925억원을 들여 설비를 보강하고 수명을 10년 연장했다. 여기에 수명 연장이 적법하냐를 놓고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2022년 11월이면 자연스럽게 폐쇄할 수 있고, 법원 판결에 따라 시기가 빨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공약에 따라 조기 폐쇄를 감행했다.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난 것은 예정대로 원전을 운영했을 때의 경제성 평가를 의도적으로 낮춰 평가의 신뢰성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대통령 공약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 역시 적법 절차를 따라야 한다. 담당 공무원이 켕기는 마음에 심야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가 자료 삭제를 해야 할 정도였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

수명이 정해진 월성1호기처럼 검찰총장도 임기제다. 내년 7월이면 윤 총장의 임기가 끝나고 정권이 원하는 사람을 새 총장에 앉힐 수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휘두르는 인사권과 수사지휘권에 윤석열 검찰총장은 식물상태가 됐다. 그런데도 감찰과 징계위를 통한 윤 총장 쳐내기 수순으로 들어갔다. 지난달 초 원전 조기 폐쇄 의혹 수사를 담당하는 대전지검이 대대적 압수수색에 나선 것과 관련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한다는 말처럼 윤 총장 쳐내기는 절차나 명분이 너무 미흡했다. 오죽하면 윤 총장 감찰을 담당한 이정화 대전지검 검사(법무부 파견)가 “판사 문건은 죄가 안 된다고 했는데 이 부분이 보고서에서 삭제됐다”고 문제를 제기했을까.

윤 총장은 취임 초 특수부 출신만 챙긴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런데도 전국 59개 지검과 지청의 평검사가 모두 참여해 윤 총장에 대한 징계청구와 직무배제가 부당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를 검사들의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행위다. 추 장관과 가깝다는 조남관 대검 차장도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검사는 총장님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날 만큼 중대한 비위나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법무부 감찰위원회도 지난 1일 출석 위원 7명 전원 의견으로 징계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뜻을 모았다. 서울행정법원도 윤 총장이 낸 직무배제 집행정지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장인 조미연 부장판사는 결정문에서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맹종할 경우 검사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유지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총장이 명을 거역했다며 소리를 높이던 추 장관에 대한 ‘강렬한 한방’이다.

정치인들은 유불리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겠지만 판사와 검사·공무원은 정치인이 아니다. 밤중에 사무실에 들어가 몰래 자료를 파기하고, 불리한 내용을 빼버리고 징계 서류를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원전 자료를 삭제한 공무원을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윤 총장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법조계에선 임기제 총장을 이런 식으로 몰아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진영 논리가 첨예한 세상이지만 상식의 눈을 감고 양심의 귀를 막아선 안 된다. 명단도 공개되지 않은 검사징계위원들에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당신은 공무를 수행합니다. 마음에 켕기는 게 있다면 그런 일은 하지 마세요.”

김원배 사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