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 읽기

바다와 푸른 올레길

중앙일보

입력 2020.12.0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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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윤동주 시인이 멋진 동시 작품들을 남겼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동시 ‘반딧불’를 좋아한다.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이라고 쓴 짧은 시이다. 아이의 동심이 한껏 묻어 있다. 캄캄한 밤에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을 “부서진 달조각”이라고 노래한 대목에선 그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주 올레길 걷는 기쁨 새로워
걷기는 마음속 친구 만나게 해
부드러움과 자애를 보살폈으면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바다가 등장하는 것도 좀 특별한 주목이 필요해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시 ‘바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섧어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우리나라 근현대 시단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창작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정지용 시인에 이르러서야 바다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이다. 정지용 시인은 1927년 ‘바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시에서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라고 썼다. 그리고 1935년에는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랐다”라고 시작하는 명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푸른 물결이 빠르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을 도마뱀떼의 긴박한 움직임에 빗대 생생하게 표현했다.

내륙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 시인이 바다를 노래하게 된 배경을 그의 현해탄 경험에서 찾기도 한다. 정지용의 바다시 이후에 바다를 노래한 시가 많아졌고, 그 영향이 윤동주에게도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다 얘기를 이처럼 길게 하는 이유는 얼마 전 제주 올레길을 걸었던 기억이 예전에 읽었던 이러한 시편들과 마음속에서 서로 어울렸기 때문이다. 제주올레 걷기축제 막바지 날인 지난달 중순에 올레길을 걸었다. 제주올레 걷기축제는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참가자 수를 줄이고 참가자들을 나눠 23개의 코스에서 흩어져 걷도록 했다. 제주 올레길을 다 걸으려면 꼬박 23일이 걸리는 일정이었다. 발열 체크도 하고, 마스크를 쓴 채 거리를 두고서 걸었다.

내가 걸었던 올레길 코스는 5코스였다.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포구에서 쇠소깍다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걷는 내내 파도 소리가 따라붙었다. 해풍에 오징어를 널어 말리는 것을 보며 걸었다. 바닷물에 씻기는 몽돌의 해변과 노랗게 익은 감귤이 따닥따닥 매달린 감귤밭을 끼고 걸었다.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우람한, 수령이 아주 많은 동백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동백나무 군락지는 열일곱 살에 시집온 현맹춘 할머니가 가꾼 것이라고 했다. 해초를 캐고 품팔이를 해 어렵게 마련한, 황무지 같은 밭에 억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 씨앗 한 섬을 따다 심었다고 했다. 현맹춘 할머니는 1858년에 출생하셨으니 동백나무들의 수령은 140년이 족히 넘었다. 동백꽃이 한창 필 무렵에 한 차례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또한 제주 올레길이 총 425킬로미터에 이르는 26개의 코스가 있다니 그 길들을 틈틈이 걷고 싶어졌다.

바닷길을 느리게 걷다 보니 그냥 지나치던 풍경이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유행으로 불안하고 답답하던 마음도 참으로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일본의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외로운 인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야말로 외로운 인격에 친구가 생겨난 느낌이었다. 느리게 걷는 일은 나와 자연의 생명들을 생생하게 느끼는 일이요, 신선한 생기를 호흡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무엇보다 자애(慈愛)가 생겨났다.

“고맙다, 나의 친구,/ 조용한 숨결,/ 졸리운 두 팔의 부드러움,/ 잠든 입술의 옹알이,// (……) // 내가 깨어난 시선으로/ 너의 윤곽을 바라보자/ 너, 나의 천사 바로/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 이 시는 러시아 시인 소피야 야코블레브나 파르노크의 시 ‘헌시’이다. 이 시를 올레길을 걸으면서 잠깐 만난 자연과 나의 외로운 인격에 생겨난 마음속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다. 빠르게 지나치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멈추거나 느리게 걷는 순간에 만나게 된다. 바쁜 생활의 책갈피 속에 꽂혀 있는 기쁨과 고요함과 너그러움을 수시로 발견하면서 살 것, 이것이 바다와 푸른 올레길을 걸을 때 알게 된 마음속 친구가 들려준 조언이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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