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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은퇴 후 등산만 한다? 종로에 집짓고, 시인·화가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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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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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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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재무·건강·여가·대인관계 등의 4박자가 필요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2월 35~69세 1500명을 조사한 노후준비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건강이 100점 만점에 74.1점으로 가장 높다. 대인관계 67.3점, 재무(소득) 60.3점이다. 여가(59.6점)가 최악이다. ‘일만 하는 당신, 즐길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신중년 은퇴 후 여가 찾기 활발 #연금공단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 #중1 때 간직한 문학소년 꿈 이뤄 #미로같은 대학병원 동행 서비스 #“삶의질 위해 여가정책 강화해야”

일부 대기업·공기업에서 직원 은퇴 교육을 하면서 여가 활용법을 알려주지만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은 별로 없다. 이삼식 한양대 정책학과 교수는 “재무·건강은 노후준비의 기본이다. 그동안 여기에 집중돼 있었고, 여가(문화)는 관심에서 밀려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2015년 노후준비지원법이 생겼고, 국민연금공단이 전국 109개 지사에서 노후준비지원서비스를 수행한다. 2018년부터 상담에서 한 발 더 나간 신중년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여가 활용법에 초점을 맞췄다.

공무원 퇴직자 오민제(오른쪽 맨 앞)씨를 비롯한 연금공단 인생그림책 수강생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 [사진 오민제 제공]

공무원 퇴직자 오민제(오른쪽 맨 앞)씨를 비롯한 연금공단 인생그림책 수강생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 [사진 오민제 제공]

2년 전 37년의 공직생활을 마친 오민제(62)씨는 ‘인생 그림책’ 프로그램 덕분에 늦깎이 화가로 나섰다. 퇴직 전 뭘 하고 보낼까 고민하다 그림을 선택했다. 유튜브로 독학하다 퇴직 후 6개월 미술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국민연금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10명의 동년배와 부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부산관광공사 ‘신중년 여행하기’ 코너에 올린다. 차비 조로 월 49만원을 받았다.

오씨는 “퇴직해 보시라, 어디서도 연락이 안 온다. 가족만 남는다. 퇴직 후 외로움과 우울감이 컸는데, 연금공단 아카데미에서 노후준비 마지막 박자를 찾았다”며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과 같은 취미활동을 하고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고, 그림 스케치 마치고 막걸리 한잔하는 게 매우 즐겁다”고 말한다. 그는 “아카데미가 숨은 재능을 계발해줬다.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일기 쓰듯 그림을 그리려 한다. 그림 한 점 그리면 오전이 다 간다. 고급스러운 취미이고 돈도 안 든다”고 말한다.

연금공단 작가탄생 아카데미에서 시인의 꿈을 이룬 김광석씨가 경북 울진군 월송초등학교에서 시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사진 국민연금공단]

연금공단 작가탄생 아카데미에서 시인의 꿈을 이룬 김광석씨가 경북 울진군 월송초등학교에서 시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사진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 가입자 김광석(56·서울 마포구)씨는 올해 33년 직장생활을 마감한다. 우연히 국민연금 신중년 아카데미 ‘작가탄생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중1 때 품었던 시인의 꿈이 문득 되살아났다. 한시도 잊지 못한 꿈이었다. 지난해 10월 교육을 받고 그동안 세 권의 시집을 냈다. 그는 지난달 27일 수강 동기 3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 월송초등학교를 다녀왔다. ‘꼬마 작가 탄생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책 만들기를 강의했다. 경기도 양평군의 문화센터에서도 강의한다. 김씨는 “신중년 아카데미가 로망처럼 간직한 꿈을 이루게 해줬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게 이렇게 보람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한다.

창업아카데미 출신 전문숙(오른쪽)·김예원씨가 사찰 음식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창업아카데미 출신 전문숙(오른쪽)·김예원씨가 사찰 음식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인천 강화군 전성인(52)씨는 연금공단의 신중년 창업·커뮤니티케어 아카데미에서 병원 동행 서비스를 배웠다. 최근에는 인천의 50대 요양원 환자를 대학병원에 데리고 갔다. 가족에게 환자 상태를 듣고 의사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환자 대신 답하고, 의사 설명을 자세히 기록해 보호자에게 전달하고 약 조제를 도왔다. 전씨는 “최근 부모님이 병원 갈 때 동생들과 시간을 조율하는 게 힘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병원 동행 서비스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며 “아픈 사람을 돕고, 생활비도 보태게 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씨는 병원동행 서비스 협동조합을 만들 예정이다.

노후준비 실태.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노후준비 실태.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연금공단 아카데미에 공동체 주거 분야가 있다. 100여명이 교육을 받았고, 이 중 8명이 팀을 이뤄 땅부터 공동주택 준공까지 진행한다. 서울 종로구에 지난달 ‘맑은 구름집’이라는 4층 다세대주택(8가구)이 완성돼 입주했다. 가구당 6억~6억5000만원, 총 50억원이 들어갔다. 서울시가 0.7%의 저리 융자를 지원했다. 이 집의 특징은 지하에 있다. 공용주방·서재·세탁실·창고가 있고, 피아노나 요리 등을 배우는 교육장이 있다. 서울시의 지원 조건에 맞춰 지하공간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한다. 주민들은 아카데미에서 대인관계, 공동체 생활 유의사항 등을 배웠다. 연금공단 선정현 과장은 “혼자가 되는 게 두렵거나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사람이 집을 지었다”고 말한다. 서울 구로구에도 또 다른 집이 올라가고 있다.

공동체 주거 아카데미 출신 8명이 건설한 서울 종로구 맑은 구름집. [사진 국민연금공단]

공동체 주거 아카데미 출신 8명이 건설한 서울 종로구 맑은 구름집. [사진 국민연금공단]

신중년 프로그램은 2018년 도입 후 23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50세 전후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일부는 적합성 테스트를 한다. 사진에세이·다큐멘터리 제작·로컬여행 디자인·토론 팟캐스트 등 다양하다. 일부는 졸업 후 법인을 설립했다. 신중년 아카데미가 인기를 끌지만 서울 남부·북부지역본부, 부산·대구본부 등 4곳밖에 없다. 내년에 수원·대전·광주에 생기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대도시보다 농어촌 거주자, 저학력자의 여가 준비 점수가 더 낮았다. 이런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삼식 교수는 “80, 90세까지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여가·문화 생활이다. 선진국에서 보듯 소득과 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축이 여가로 옮겨간다”며 “복지관 말고는 갈 데가 마땅하지 않다.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인프라나 프로그램이 부족한데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