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사이다’의 경제적 비용

중앙일보

입력 2020.12.01 00:40

지면보기

종합 25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에디터

서경호 경제에디터

답답한 세상, 사이다처럼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누가 마다하랴. 정치인의 ‘사이다 발언’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돈 안 드는 사이다 발언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돈이 꽤 들어가는 ‘사이다’가 꽤 있다. 말씀은 시원하고 아름답지만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 지갑은 누가 열지는 대부분 눙치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여론 난기류에 빠진 항공사 합병
속이 시원할수록 돈은 더 들어가
법원, 국민 부담을 최우선 고려해야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사이다’에 숨어 있는 경제적 비용을 차분히 따져보는 게 좋다. 대개 속이 시원할수록 값비싼 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발표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빅딜 반대론도 그렇다. 글로벌 7위권 통합 항공사가 탄생한다는 화려한 팡파르가 끝나자 당장 ‘재벌 특혜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산업은행이 8000억원을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3자 배정 유상증자 등의 방식으로 넣으면 이 자금을 마중물 삼아 대한항공이 돈을 끌어모아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는 게 빅딜의 골격이다. 이렇게 되면 산은은 한진칼에 11% 지분을 갖게 되는데, 결국 경영권 분쟁 중인 조원태 한진 회장에게 유리해진다는 게 재벌 특혜론의 핵심이다.

재벌 특혜론으로 인수합병(M&A)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동걸 산은 회장이 기자간담회를 하고 다수의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진화에 나섰다. 산은이 조원태 회장의 한진칼 지분 전체를 담보로 잡았으며 통합 이후 성과를 못 내면 경영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안 그래도 국책은행인 산은을 통해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항공 사회주의’라는 지적이 나오는 와중에, 공공기관처럼 ‘경영평가’까지 하겠다고 하니 항공산업 준(準)국유화 논란으로 이어졌다. 산은이 ‘재벌 특혜’를 부인하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 과도한 경영 개입으로, 나아가 사실상 ‘항공산업 국유화’까지 연결돼 버리는, 참으로 난처하고 복잡미묘한 상황이다.

서소문 포럼 12/1

서소문 포럼 12/1

재벌에 특혜를 준다는 비판도, 결국 정부 돈인 8000억원이 들어가는 만큼 한진이 ‘허튼짓’ 못하게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사이다’에 속한다. 여론의 불만을 일시 누그러뜨릴지는 모르나, 결국 정부와 산은의 과도한 개입으로 이어져 통합 항공사의 부담만 키울 가능성이 크다. 실적 나쁘면 자르겠다고 산은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서 자율적인 책임경영이 제대로 이뤄지고 민간의 경쟁력이 얼마나 발휘될 수 있을까.

속 시원하고 완전무결한 답이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때가 좀 묻고 멋지지 않아도 합리적인 선택일 때가 있다. 다소 흠이 있더라도 이번 빅딜은 국민 부담을 가장 줄이는 방식이다. 이동걸 회장은 합병이 무산되면 아시아나는 물론 대한항공의 독자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35조원의 빚이 있는 통합 항공사가 활주로를 박차고 제대로 뜰 수 있느냐다. 두 회사가 1년 안에 갚아야 할 빚만 따져도 13조원에 달한다. 산은과 대한항공이 공언한대로 인위적인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매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대안 없이 빅딜을 비판하기만 하면 통합 항공사의 운신 폭을 더 좁히게 된다. 여론에 휘둘리다가 통합 항공사가 아무것도 못 하고 코로나 위기가 끝나서 항공수요가 정상화되기만을 기다리는 ‘천수답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그게 더 걱정이다.

과거에 우리 사회가 ‘사이다’ 좋아하다 크나큰 대가를 치른 게 어디 한둘인가. 론스타가 대표적이다. “투기자본 론스타의 먹튀를 막아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금융당국이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질질 끄는 바람에 결국 국제 중재 소송으로 이어졌다. 8년 전 47억 달러(5조 2000억원)를 요구하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던 론스타는 최근 8억7000만 달러(9700억원)의 타협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도됐다. 소송의 최종 결과는 둘째 치고라도 그동안 론스타 때문에 허비한 법률 비용과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만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항공 빅딜의 첫 번째 관문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결정이 오늘 나온다. 사모펀드 KCGI 측이 한진칼을 상대로 낸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면 빅딜은 물거품이 된다. 국민 부담의 최소화가 항공 빅딜을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잣대가 돼야 한다. 나무보다 숲을 조망하는 법원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한다.

서경호 경제에디터

Innovation Lab

ADVERTISEMENT